톰소여와허크 2012. 4. 14. 23:59

 

살구 씨/ 이동훈


응달진 담벼락 밑이 고향인 살구 씨.
빛받이도 없는 좁은 골목에
무연고자로 쓸쓸히 내동댕이쳐진 생이다.
누군가 무심히 뱉고 지났을 자리에
살구 싶다고 살구 싶다고
머리를 내민 것은 순전히 살구 씨의 오기였다.
반대편 담장으로 금세 빠져나가는,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빛을 그러모아
눈만 겨우 씻고 나면
낮이나 밤이나 어두침침했으니
살구 씨는 몸 가누는 일조차 시원찮았다.
영양실조로 배가 불거지는 대신
살구 씨는 몇 해 동안 웃자라기만 하여
삐쩍 마른 몸에도 키가 네댓 길이나 되었다.
끝끝내 그리던 빛에 닿은 것은
살구 싶다는 살구 씨의 간절함이
해를 당겨 키를 키운 것인지도 모른다.
빛기둥처럼, 붉은 살구나무가 된 살구 씨.
살래살래 부는 봄바람이

불임의 몸을 치유하는지 몽우리가
처음으로 잡힌다.


* 살구의 계절이다. 몇 주 후 노란 살구가 익을 것이다. 살구 싶다구 하는 살구의 말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몇 해의 계절이 갔다. 담벼락 밑에 떨어진 살구 한 알 손에 쥐는 날, 성큼한 여름을 보게 될 것이다.
(김부회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