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어나무 / 나석중
서어나무 / 나석중
나는 오랫동안 떡갈나무를 좋아하였지만 될 수만 있다면 나는 서어나무가 되고 싶다. 떡갈나무가 푸른 앞섶을 열고 내미는 젖꼭지에 입을 댄 날 많았지만 요즈음에 와서 나는 울퉁불퉁한 서어나무 근육에 자주 눈길이 닿는 것이다.
나는 또 자꾸 대드는 사람에게 물러터지는 사람이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서어나무의 단단한 성품을 닮고 싶은 것이다. 다시는 세상의 달콤한 유언에 속지 않고 걸레 같은 사랑에도 홀리지 않겠다.
여러 잡목림에서 유달리 무엇인가 훈계할 듯 성큼성큼 다가오는 외삼촌 같은 서어나무의 딱 부러진 결단력 같은 것을 이제 좀 받아들이겠다.
- 『물의 혀』, 문학의전당, 2012.
* 사람마다 마음이 끌리는 나무가 다르다. 괜히 좋다고도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전생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세의 삶을 지나오며 쌓인 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기억의 편린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떡갈나무 열매를 “푸른 앞섶을 열고 내미는 젖꼭지”로 인식하는 것을 모성에 대한 그리움이나 결핍감으로 넘겨짚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근육”이 도드라진 서어나무 줄기를 보면서, 자신에게 부족한 면을 생각한다. “물러터지는” 성격으로 살다보니 손해나는 일이 많았을 테니, 맘 같지 않은 세상인심이나 사람 관계로부터 내상(內傷)도 입었을 테니, 서어나무의 “단단한 성품”에 몹시 끌리는 것이다.
서어나무를 닮은 외삼촌의 “결단력”까지 흠모하지만 화자가 그렇게 모질어질지는 의문이다. 어쩜, 떡갈나무 “푸른 앞섶”에서 순한 얼굴로 고분고분 서 있을 것 같기도 하고.(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