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일화

이쾌대(1913-?, 경북 칠곡)

톰소여와허크 2012. 4. 22. 12:56

 

이쾌대(1913-?, 경북 칠곡)

 

 

  아래는 영남일보에 실린 이하석의 글입니다.

[ 이쾌대는 1913년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신리의 웃갓마을 39번지에서 태어났다. 신동소학교에 입학했다가 대구 수창보통학교에 전학해 졸업했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시절 미술을 배운 후부터 적극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휘문고보 재학시절인 1932년, 화단에 이름을 올린 그는 1934년 동경제국미술학교(東京帝國美術學校)에 입학, 1939년에 졸업했다. 서구적 지성과 방법론을 토대로 하는 그의 화풍은 지극히 향토적이고 민족주의적 색채가 농후했다. 월북 후인 1947년 북한 미술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글을 통해 나름대로의 자주성을 보였지만 1960년대 이후 북한 사회주의의 형상화라는 새로운 ‘주체미술’에 동조하지 않아 숙청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숙청된 이후 자강도 강계시에서 살다가 1987년 타계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이쾌대의 작품은 서사적이고 장엄한 화풍으로 ‘한국의 미켈란젤로’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영남일보의 이쾌대 스토리는 칠곡 출신 이쾌대의 삶과 작품세계를 그렸다.

 

 

  꿈같이 보였다. 울타리가 없어지고 있었다. 오래 ‘우리(민족)’를 에워쌌던 울이 지워지고, 너른 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에서 빠져나온 야수처럼 이쾌대는 들판을 바라보았다. 들판 너머 울멍줄멍한 언덕 위로 스산하면서도 장대한 구름이 피어올랐다. 수많은 인간들이 떠올랐다. 울타리 안에서 스스로, 서로, 지옥이 돼버린 인간들이 차츰 광휘의 들판으로 환호하면서 손에 손을 잡고 나가는 모습이었다.

  이쾌대는 왜 갑자기 그러한 꿈이 자신에게 꾸어지는지 궁금해 하면서도, 그 꿈을 떠올리며 스케치를 해나갔다. 일제 강점기 말의 암울한 현실을 뚫고 내다본 예감이었다. 곧 해방이 될 것 같은 예감!

  그런데 그게 맞아떨어졌다. 곧 이어서 해방! 광복이 된 것이다. ‘우리’를 에워쌌던 울타리가 없어졌다. 그는 해방의 현실을 기껍게 누리며 맘껏 꿈을 펼치리라 여겼다. 해방 직후 조선미술건설본부에 가입해 가을에 열린 ‘해방기념 문화대축전’에 출품했던 감격이 컸다. 그 감격으로 1946년 독립미술가협회 결성에 참여했다. 임화와 김남천 등과 함께 조선문화단체총연맹 결성에 참여, 그 연맹 산하 조선조형예술동맹의 회화부 위원이 되기도 했다. 조선미술동맹 서양화부에 박영선과 공동위원장을 맡기도 했으며,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해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꿈처럼 순탄하게 전개되지 못했다. 해방공간의 현실은 일제가 물러간 대신, 서로간의 반목과 분열로 찢겼다.

  “왜 우리는 갈등과 반목으로만 아까운 세월을 보내야 하는가? 나는 이런 현실을 꿈꾸지 않았는데….”

  그는 해방 직전 스케치했던 수많은 인간들의 모습을 다시 꺼내 들여다 보았다. 거기에는 ‘우리’를 가두는 울을 거둬내려는 의지가, 지옥같은 현실을 딛고 일어서려는 해방의 꿈만이 넘실대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의 표정과 몸짓으로 떠오르는 그 꿈은 얼마나 절박하고 순수한 것이었던가? 분열과 갈등이 없이 오직 환한 빛의 세계를 향한 그리움만이 넘실대는 역동적인 풍경! 그것을 그려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해방 직전 구상했던 작업의 실현에 몰두했다. 서사적이고 장엄한 화풍으로 한국 화단을 아로새긴 ‘군상’ 시리즈가 그렇게 모습을 드러냈다.

 

  ‘군상1- 해방고지’가 단숨에 화폭에 펼쳐졌다. 죽은 이의 시체와 머리를 감싸안고 있는 인물을 오른쪽 아래에 전체 화면을 받치듯이 배치했다. 고통과 고난의 세월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 고통과 고난을 딛고, 수많은 이들이 화면의 중앙까지 차있게 그렸다. 사람들은 왼쪽에서 달려오는 두 여인을 맞이하면서 함께 나아가려는 모습으로 떠오르게 그렸다. 달려오는 두 여인은 환희에 차 있다. 바로 해방의 소식을 전하는 모습이다. 아래에 있는 고난의 모습과 그 위로 서 있는 군상, 그리고 달려오는 두 여인의 모습으로 이뤄진 삼각구도는 암울했던 과거와 설레는 현재, 그리고 환희의 미래를 상징한다고 그는 여겼다.

  ‘군상’ 시리즈를 작업하는 동안 그는 혁명가처럼 뜨거운 열정을 화폭에 쏟아 부었다. ‘군상2’와 ‘군상3’을 거쳐, 그의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군상4’를 그렸다. ‘군상4’에는 화면을 가득 채운 인물들의 역동적인 모습이 부각돼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인물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갈수록 역동적이 되게 표현했다. 그리하여 오른쪽의 엎드려 있거나 내던져져 있는 사람들이 화면의 중앙으로 갈수록 서서히 일어나는 모습이 되고, 이어서 왼쪽 화면으로 가면서 굳건한 자세로 서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표정이 되게 그려 나갔다.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적인 모습을 담은 거대한 벽화처럼 떠올려야 해.”

  이쾌대는 그림을 통해 역동감 있는 ‘위대한 우리’를 드러내려 했다. 구성과 인물들의 표정이 사뭇 서사적인 장대한 것으로 부각되게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혼돈과 혼란이 질서와 안정으로 바뀌면서, 새롭게 거듭난, 살 만한 세상의 꿈이 드러났다. 수많은 인물들은 나체로 꿈틀대면서 역동감을 자아내게 했다.

  “그래, 이 그림처럼, 현실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극복돼 새로운 세계를 열게됨을 나는 믿는다”고 그는 몇 번이나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1949년 제4회 미문협전에 그는 기꺼이 ‘군상’을 내놓았다. 그림에 대한 찬사와 비난이 엇갈렸다. 처음 선보이자마자 대단한 문제작임이 대번에 드러난 것이다. 이념적인 또는 양식적인 면을 들어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의 독창성을 칭찬하는 소리가 높았다. 박문원은 그를 비난하면서도 “인민미술에 대한 열정은 오직 이쾌대씨에게서만 느낄 수 있다”고 격찬했다. 김용준은 “서구적 지성과 동양적 감성을 융화시켜 민족성을 앙의(昻意)하는 창작적 열의를 가진 화가”라고 그를 추켜세웠다. (김진송의 ‘이쾌대’ 참조)

  반목과 갈등은 결국 전쟁을 불러왔다. 그 전부터 이쾌대는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을 겪었다. 1949년 이승만 정권의 좌파 숙정의 여파가 그에게도 미쳤다. 그 일환으로 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해야 했다. 이른바 ‘좌파’를 강제로 묶어놓은 일종의 전향자 조직이었다. 그리고 6·25전쟁 발발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다. 그러나 이쾌대는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피란을 가지 못했다. 이쾌대는 북한군에 의해 다시 전향을 강요받았다. 이런 상황이 이쾌대를 아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기 1주일 전 이쾌대는 서울을 빠져나와 북으로 향했다. 북한군 치하에서 미술동맹 회원으로 활동한 경력 때문에 겪을 혹독한 정치적 보복이 겁났기 때문이다. 북으로 올라가던 길에 그는 국군에게 체포됐다. 전쟁포로로 부산 100수용소에 수감됐다. 그리하여 1950년 11월11일자 이쾌대의 편지가 인편을 통해 가족에게 전달된 게 가족과의 마지막 연결끈이 되고 말았다.

  “한민 모(漢民母) 보오. 오래간만에 내 소식을 알리게 됩니다. 9월20일 서울을 떠난 후 오륙일 동안 줄창 걷다가 국군의 포로가 되어 지금 부산 100수용소 제3수용소에 있습니다. 나의 생사를 모르는 당신에게 이 글월을 보내게 되니…. 신병을 앓는 당신은 몇 배나 야위지 않았소. 안타깝기 한량 없소이다. 한민이, 한식이, 아침저녁으로 아버지께 뽀뽀하는 우리 귀여운 수생이, 그리고 꼬마 한우. 생각할수록 보고 싶소 그려. … 무엇보다 한 푼 없는 당신이 무엇으로 연명하는지. 내 자신이 밉살스럽기 한량 없습니다. … 나는 이 포로수용소에서 나를 두둔하는 친지들의 덕택으로 잘 있습니다. 이곳의 미인(美人) 수용소 소장이 미술을 이해하는 분인 까닭에 화용지와 색채도 구해주셨습니다. …아껴둔 나의 책은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틀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주시오. 전운(戰雲)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 때는 또 그때대로 생활설계를 새로 꾸며봅시다.”

  휴전 이후 포로 송환이 이뤄졌다. 그는 그때 북을 택했다. 그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따른 잠깐의 선택일 뿐, 곧 가족을 만날 것을 믿었으리라.

  이후 이쾌대의 아내 유갑봉은 남편을 기다리는 것으로 세월을 다 보냈다. 간간이 북에서 이쾌대의 미술활동이 활발하다는 소문이 들렸으나, 무엇 하나 확인해 볼 수 없었다. 월북작가란 딱지는 길게도 따라붙어 가족들을 괴롭혔다. 그런 가운데서도 유갑봉은 남편의 작품들을 한사코 지켰다. 흡사 그것들이 남편의 분신인 것처럼 1980년 죽기 전까지 벽장 깊숙한 곳에 감춰두고 살뜰하게 지켜냈다. 그의 작품 상당수가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있게 된 것은 이런 아내의 눈물겨운 헌신 덕분이다. 전쟁 이후 유갑봉은 집의 옷가지를 내다 팔아 연명을 했다. 그리고 어려운 시기에 포목점을 하면서 네 자녀를 키웠다.

  긴 세월 끝에 마침내 그의 작품이 내놓여졌다. 1988년 월북화가에 대한 해금조치 이후였다. 91년 10월8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신세계미술관에서 열린 ‘월북화가 이쾌대전’은 우리 화단으로 하여금 놀라운 탄식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의 작품 ‘군상’ 시리즈 앞에 모여들었다. ‘초기 현대미술 최고의 작가’란 찬사가 쏟아졌다.

  비로소 그의 작품이 우리 현대미술의 공백기를 아주 아름답게 메운, 현대미술 초창기를 새로운 꿈으로 아로새긴 확실한 증거로 자리매김했다.]

 

 

 

  아래는 최석태의 글입니다.

[ 이른바 월북화가인 이쾌대(1913~1965)는 지금은 대구에 속한 경북 칠곡 사람이다. 초등학교를 총독부가 만든 스타화가 이인성과 같이 보냈고, 서울에서 보낸 중등과정 때는 그림 그리기와 야구에 몰두했다. 졸업 전에 서울로 유학 온 강화도 아가씨와 일찍 결혼해, 일본에서 대학을 보냈다. 그 뒤 활동시기에 남겨진 수많은 습작을 통해 그림에 몰두했음을 알 수 있다.

  족두리에 연지곤지를 한 결혼 옷을 입은 여자의 좌상을 그린 데 이어, 온통 벗다시피 하고 드러누운 남자를 둘러싸고 우는 여자들을 통해 식민지 삶을 포착했다. 이후 신윤복의 그림에 나올 것 같은 머리 매무새를 하고 색동옷 입은 미녀를 그리면서는 면상필(가늘고 작은 글씨를 쓰는 붓의 하나)을 이용해 윤곽선이 도드라지게 했다.

  우리다운 유화, 즉 한국 유화를 그리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억압받아 사라지거나 변질하고 있는 우리 옷과 꾸미개(장신구)를 살리고, 명암법과 원근법에 강요된 그림 세계를 우리의 전통적 시각으로 바꾸려고 했다. 이중섭 등과 만든 조선신미술가협회는 이런 움직임을 보인 귀중한 미술운동이었는데 널리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다.

  광복 후 그는 화법을 바꾸는데, 이전에 그토록 극복하고자 했던 서양식이어서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당시에도 그의 변화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잦았다. 왜 그랬을까? 해방이라는 현실 속에서 민족형식보다는 보편형식을 지향하여 그린 것 때문은 아닐까, 추측해 볼 뿐이다.

 

그에게는 월북인사로 분류되는 형, 이여성이 있다.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이면서 식민지 경제 실태에 대한 방대한 조사서를 썼고, 복식사, 역사화, 민족고전연구 등 분야를 가늠하기 어려운 다양한 업적을 남긴 거인이다. 여운형의 동반자이기도 하다. 좌우를 넘어 존경받았던 그는 분단을 막고자 북으로 갔다 머물게 됨으로써 월북자가 되었다. 북에서는 김일성대학 역사학부 책임자로 일하며 미술사, 건축사, 공예사 저서를 남기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의 미술사 연구들은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전문가 수준의 저서인데, 북은 물론이고 남에서도 거의 잊혔다.

  북한 점령 시기 어머니 병환 탓에 피란을 못 간 이쾌대는 할 수 없이 부역에 불려가 여러 그림을 그렸다. 국군의 서울 수복 뒤 앞으로 일어날 비극이 두려웠던 그는 서울 집을 나서서 북쪽으로 출발하자마자 붙잡혀 포로로 분류, 부산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다른 수용소에 있던 화가 오지호가 그랬듯 특기대로 그림을 가르쳤다. 이름난 화가라는 소문을 들은 미국인 소장이 그의 그림을 보고 반해서 일시 방면해 수용소 밖에 나가 그림 재료를 구해오도록 조처해 주는 일도 있었다.

  그 틈에 그는 서울의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 당시 어머니는 오늘내일 하는 상태였고 우체국으로 가려고 집을 나서면 테러를 당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워낙 동네 사람도 잘 알고 존경받던 형제라 월북자였어도 집을 빼앗기고 내쫓기는 일을 피한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휴전 직후 거제에서 맞은 포로 교환 때 북을 선택했다.

  그는 이미 북 나름으로 짜진 주류 화가사회에서 벗어나 제자의 집에 얹혀살았고, 제자의 주선으로 재혼하여 아들을 낳아 살다가 수용소에서의 후유증으로 죽었다. 당시의 평균 수명은 넘겼지만 너무나 아까운 이른 죽음이었다.]

 

 

  1962년까지 그림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이후의 행적은 엇갈린다. 숙청된 이후 자강도 강계시에서 재혼하여 살다가 1987년 사망한 것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1965년에 위궤양으로 고생하다가 사망했다는 설도 유력하게 제기되었다.

 

  시인 고은 <만인보>에서 시 '이쾌대'를 썼다.

 

 

1947년 작 '군상'을 보았는가

민족

그리고

인간의 얼굴을 보았는가

 

 

그림 하나가 백년의 역사인 것을 보았는가

 

 

예언의 예술가는 괴로웠다

월북

국군 포로였다가 탈출

다시 월북

 

 

그리고 그는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