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모퉁이 수선집 / 박일만

톰소여와허크 2012. 5. 1. 08:56

모퉁이 수선집 / 박일만

 

 

골목은 늘 객관적이다

백열등 밝혀 둔 좁은 공간

의족을 수선실 바깥으로 길게 걸쳐 놓았다

바닥까지 검정물 든 손을 탁, 탁 치며, 이제 그만 해야죠

그만둬야죠, 습관처럼 중얼거린다 초로의 사내

십수년인 듯 굵어진 손마디가 고집스럽다

피곤한 구두를 벗어 수선을 맡기는 저녁 무렵

내 구두는 이제 항해를 끝낸 폐선처럼 어둡다

좀처럼 광택이 살아나지 못할 거죽으로 찌그러져,

능동적이지 못한 내 성품을 비웃듯 손 빠른 사내

해진 일상을 기우고 봉긋한 광택을 생산한다

허리춤을 꾸욱 찌르고 견고한 실로 혈관을 심고

벌겋게 온몸을 지지고 닦아 환하게 빛을 복사해 낸다

자, 다시 한번 가면을 쓰고 살아 보세요

그래도 세상은 적당히 가리면 살 만하잖아요

손에 친친 광목을 감은 사내의 손놀림에 취해

왁스에 취해 밖을 바라본다

이 거리에서 오래오래 부대끼며 살아온 나

그만둬야지, 이제 정말 쉬어야지 하면서도

끝내 꽃피우고 싶은 무화과나무가 있는 거리 모퉁이

천천히 아주 객관적으로 어두워간다

 

-『사람의 무늬』, 애지, 2011.

 

* 시인은 “골목”과 “거리 모퉁이”를 “객관적”이라고 한다. 어느 동네에나 있을 법한 익숙한 골목 풍경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시적 화자나 시적 대상(수선공)으로부터 부러 거리를 두고 덤덤해지려는 의도가 작용해서 일 수도 있다. 어쨌든 “객관적”이라는 낯선 시어가 “객관적”이지 않은 정서적이고 주관적인 몰입을 유도한다는 데 이 시의 재미가 있다.

  골목 모퉁이 수선집에 “초로의 사내”끼리 앉았다. 한 명은 수선공이고 한 명은 낡은 구두들 수선하러 온 화자이다. 수선공과 손님은 꽤 닮았다. 그들은 신거나 기워야 할 “피곤한 구두”, “좀처럼 광택이 살아나지 못할” 구두처럼 고단해 보인다.

  습관처럼 되풀이되는 “그만둬야지” 라는 말에서 일상을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와 그로부터 놓여나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읽게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지금껏 골목을 벗어나지 못했듯 앞으로도 쉽게 생계와 직결되는 일거리로부터 자유로워질 것 같지 않다. 이들의 솔직한 속내는 골목에 피는 무화과나무처럼 해마다 자기 깜냥의 꽃을 피우고 싶다는 데 있을 것이다.

  골목은 어두워가지만 곧 집집이 불을 켤 것이다. “해진 일상”을 기우려 하고, 깁기도 하는 이 시대의 가장이 있어서 골목은 ‘객관적으로’ 따스하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