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의 밤/ 이은봉
떠돌이의 밤 / 이은봉
오랫동안 외지를 떠돌다가 돌아온 밤이다
긴 장마의 끝, 가슴까지 눅눅해진 밤이다
유리창에 매달려 있는 물방울들!
저도 외로워 동그랗게 몸 오므리며 떨고 있다
담배 연기로 만드는 따뜻한 도넛들!
하얗게 피어오르며 식욕을 돋우고 있다
몸보다 먼저 침대 위에 눕는 마음들!
자갈더미라도 밟은 듯 서걱대는 소리를 낸다
가슴속 붉은 해당화 열매 저 혼자 붉는 밤이다
버리지 못하는 것들 너무 많은 밤이다
- 『첫눈 아침』, 푸른사상, 2010.
* 시인이라고 해서 가정을 소홀히 할 권리를 타고난 것도 아니고, 밥벌이로부터 자유롭게 풀려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정착과 안주보다는 방랑과 모험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거나 현실에서 주어지지 않는 이상을 노래하는 시에서 시인의 시선이나 위치가 현실의 경계나 바깥에 있는 것도 떠돌이 기질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떠돌이에게 외로움은 운명 같은 것일 것이다. 위 시의 화자도 그렇다. “외지를 떠돌다가 돌아온” 집이지만 이곳이 안식의 자리는 못되는 것 같다. 느낌표(!)로 남은 “물방울”, “도넛들”, “마음들”은 둥근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순간순간 변화하고 사라지는 특징이 있다. 모나지 않고 둥근 것은 그런 관계의 지향을 의미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누울 자리에 따라온 “서걱대는 소리”는 어긋나는 관계와 불화로 인한 내적 갈등과 고통으로 볼 수 있지만, 화자는 그 이유를 자신에서 찾는다. 아직 “버리지 못하는 것들 너무 많은” 까닭이란 거다.
외로움 속에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거, 그것으로 인해 시인은 더욱 외로운 자리에 처해야 하는지 모른다. 생각하면, 시 쓰는 일 자체도 외로운 작업이다. 혼자 종이 앞에서 글자를 얻었다가 버리고, 썼다가 지워야 한다. 익숙한 것도 낯설게 봐야 하고, 낯선 것에서 새로운 것을 얻어내기 위해 정신적인 탈주를 거듭할 것이기 때문이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