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권 (전남 고흥, 1940-)
송수권(전남 고흥, 1940-)
아래는 조용호 글의 일부이다.
[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산문에 기대어’ 부분)
오늘날 시인을 있게 한 이 명편은 휴지통에서 건져냈다. 원고지가 아닌 갱지에 흘려 써 ‘문학사상’에 응모한 이 시는 휴지통으로 들어가버렸지만, 이어령씨가 발견하고 여관 주소만 적혀 있던 응모작의 주인을 수소문해 1년 만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1975년 데뷔 과정의 일등공신이 이어령씨였다면, 정작 이 시를 존재하게 한 건 젊은 나이에 자살한 동생이었다. 시인의 친모는 일찍 죽었고, 계모 아래 두 형제가 살았다. 그중 한 혈육이 군에서 제대한 다음 날 친모의 무덤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됐고, 무덤 주변에는 동생이 먹다 만 알약들이 이슬을 받고 있었다. 눈썹이나 머리카락 같은 사람 몸의 터럭들은 죽어서 매장을 해도 오래 썩지 않고 남아 그 사람의 한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했다. 죽은 동생의 눈썹이 가을산 그림자에 빠지고, 기러기가 그 눈썹을 물고 날아다니는 풍경 속에서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라는 구절은 그가 와서 나의 빈 잔을 채워줄 때까지 기다리는 ‘제의(祭儀)’를 연상케 한다. 그러니 제목의 ‘산문(山門)’이란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셈이다. 시인은 어느 대담에서 ‘결국 누굴 그리워하고 산다는 것은 이 슬픈 제의(祭儀)를 되풀이하는 끝없는 행위’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강진 가는 길 차창으로 비가 들이치기 시작했다. 시인은 차 안에서도 연방 담배를 놓지 못한다. 하루에 세 갑 정도는 피운다고 했다. 그날 밤 강진의 식당에서 늦은 시각까지 송수권 시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순천사범학교를 나와 서라벌예대까지 졸업했지만 등단이 여의치 않아 문학 화병이 들었던 데다 피를 나눈 형제마저 자살해버리자 20대 초반의 젊은 시인은 섬으로 발령을 자청해 초도중학교 교사로 6년을 살았다. 여수에서 뱃길로 오래 달려 거문도 못 미쳐 당도하는 그 섬에서 시인은 문학을 제쳐두고 낚시에 빠져 살았다. 첫 발령지의 중학교에서 만났던 제자를 ‘납치하다시피’ 데리고 섬에 들어와 3남매를 낳았다. 6년이 지나고 다시 섬으로 발령이 나자 시인은 섬을 나와 홀로 절과 도시를 떠돌았다. 어쩌다 서울에 입성해 서점에서 다시 처음 보게 된 문예지가 ‘문학사상’이었고 여관에 틀어박혀 갱지에 응모작을 써서 투고한 뒤 고향에 내려와 농사를 짓다가 데뷔하게 된 거였다. 이후 그가 펼쳐온 시의 풍경은 남도의 정서를 대변하는 진경이었다.
송수권 시인은 “이 세상 뻘물이 배지 않은 모든 삶은 싱겁다”고 했다. 뻘은 우리 역사에서 ‘물둑’의 정신이라고 했다. 뻘을 막아서 논으로 만든 게 호남평야요 나주평야라는 것인데, 바로 이 지역 사람들의 개척정신을 일컬어 ‘개(뻘)+ㅅ+땅+쇠(접미사)’라고 했다는 얘기다. 언제부터인가 남도 사람을 비하하는 의미로 왜곡되었지만, 개땅쇠란 대단히 긍정적인 어원을 지녔다고 했다. 시인은 이 세상 뻘물이 배지 않은 모든 것은 싱거워서 시도 삶도 아니라고 했다.
“자욱하다/ 진창이 된 저 삶들, 물이 썬 다음 저 뻘밭들/ 달빛이 빛나면서 물고랑 하나 가득 채워 흐르면서/ 아픈 상처를 떠올린다 저 봉합선(縫合線)들,/ 이 세상 뻘물이 배지 않은 삶은/ 또 얼마나 싱거운 것이랴”(‘곰소항’ 부분)
시인은 젓갈로 유명한 곰소항이 있는 변산반도에서도 몇 년 살았다. 이곳에서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이라는 시집도 펴냈다. 평생 방황하고 방랑하는 삶이었지만 중고교 교사 30여년을 청산하고 이곳에 머물다가 ‘학사는 물론 박사학위도 없는 국립대교수 1호’로 초빙되어 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맡았다.
강진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고흥으로 내달렸다. 고흥군 두원면 학림마을. 이곳이 시인이 태어난 동네이자, 그가 누이와 함께 20리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던 현장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시인의 생가 마당에는 잡풀이 무성하고 빈 방의 장지문은 종이가 떨어져나가 을씨년스러웠다. 그는 전날 밤 강진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시에 대거 수용한 그의 시작에 대한 신념, 가락을 무시하고 역사성이 빠진 요즘 현대시의 안타까운 현실에 대해서도 토로했었다. 그가 최근 탈고한 지리산 빨치산들에 관한 대하서사시 이야기도 이어졌다. 송수권의 시는 남성적이고 강건한 서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평가가 우세한 편이다. 그날 밤 동석했던 한 시인이 그에게 “선생님 시에는 연애시가 없는 것 같다”고 말하자, 시인은 손사래를 치며 그렇지 않다고 부인했다. 귀경한 뒤에서야 그의 절절한 연애시 한 편을 발견했는데, 그 시 역시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피어 있었다.
“무슨 죄 있기 오가다/ 네 사는 집 불빛 창에 젖어/ 발이 멈출 때 있었나니/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에도/ 네 모습 어리울 때 있었나니// 늦은 밤 젖은 행주를 칠 때/ 찬그릇 마주칠 때 그 불빛 속/ 스푼들 딸그락거릴 때/ 딸그락거릴 때/ 행여 돌아서서 너도 몰래/ 눈물 글썽인 적 있었을까// 우리 꽃 중에 제일 좋은 꽃은/ 이승이나 저승 안 가는 데 없이/ 겁도 없이 넘나들며 피는 그 언덕들/ 석남꽃이라는데…// 나도 죽으면 겁도 없이 겁도 없이/ 그 언덕들 석남꽃 꺾어들고/ 밤이슬 풀비린내 옷자락 적시어가며/ 네 집에 들리라”(‘석남꽃 꺾어’ 전문)]
아래는 이송희 글의 일부이다.
[ 그는 1975년 '산문에 기대어'로 등단한 이래 지금까지 향토색 풍경과 토속의 빛깔로 전통 서정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시란 고독한 자기 영혼과 만나 대화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한밤중 적막과 고독, 슬픔 앞에서 자신을 직면할 때 우리는 자기 영혼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시는 향토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유년의 시골길에서 태어난다. 고개를 몇 개씩이나 넘어 20리 길을 걸어 다녔던 중학교 시절에도 그는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시인이 되어 보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훗날 시인이 되어 이 길에서 만났던 사람과 자연을 시로 노래하게 된 것이다.
시인은 당시 그 길에서 읽은 유일한 책 《장발장》을 기억해내며, 소설 속 여주인공 코제트라는 소녀와 닮은 한 여학생을 짝사랑했음을 고백했다. 아랫마을에 산 그녀와는 갈림길이 합해지는 신작로에서 만나 내리 3년을 같이 다녔지만,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시 '꿈꾸는 섬'은 그 길에서 만난 여학생을 기억하며 쓴 것이다. '말없이 꿈꾸는 두 개의/ 섬은 즐거워라// 내 어린 날은 한 소녀가 지나다니던 길목에서/ 그 소녀가 흘러 내리던 눈웃음결 때문에/ 길섶의 잔풀꽃들도 모두 걸어 나와/ 길을 밝'힌다는 것이다. 지금 그 소녀는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완도의 금당도 가화리 앞바다에 낚시를 갔다가 눈썹 같은 두 개의 섬이 떠 있는 것을 보고 썼다고 한다.
그의 시 쓰기는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되었다. 문예반 활동을 하며 창작에 몰두한 대신 학과 공부는 뒤처져 낙제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후에 김동리 선생께서 서라벌예대에 오면 장학생으로 받아 주겠다고 해서 몇 개월간의 교편생활을 접고 상경한 그는 스승인 서정주, 박목월 선생께 시를 배우고자 죽도록 매달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7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정에 굶주려 고독하게 자란 시간이 있었기에 문학에 대한 열병이 깊었던 것일까? 여전히 시골길 위에서 낚시와 커피 그리고 담배라는, 시인 스스로 말하는 '삼다(三多)'를 즐기며 그때의 추억을 시로 옮기고 있을 그를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