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풍/ 송수권
거풍 擧風
- 감 / 송수권
여름 장마에 누습*이 든
능화판** 문양의 비단 表紙표지 좀 슬은 책들을 꺼내놓고
곰팡이 얼룩을 지우며
가을볕에 책을 말린다
첩첩 산중에 흰 구름이 일 듯
한 장씩 책장을 넘길 때마다
행간들에서 소슬한 바람이 일고
캄캄한 묵향墨香이 코끝에 시리다
축축하게 구겨진 옷가지들을 빨아 널 듯
내 영혼 한 숟갈 표백제처럼 물에 풀린 한나절은
어초장魚樵莊 산굽이를 휘돌아나가는
섬진강 물줄기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당가 감나무 떫은 감들도 단물이 들 대로 들었는지
벌써 뺨들이 붉다
이 가을엔 농부들이 거피擧皮한 알곡들을
지붕 위에 널어 말리듯이
나도 가을볕에 나와 거풍擧風을 하고 섰다
장악원 악공들이 여름내 녹녹해진 북 가죽끈을
소리 없이 죄듯이.
*누습: 축축한 기운이 스며 있음
**능화판: 능화는 물풀로서 덩굴이 수면까지 솟아오르며 줄기 끝에서 꽃이 되어 수면을 가득 덮는다. 전통적으로 책표지 문양으로 써왔기 때문에 이에 기인하여 보통 책표지를 능화판이라 한다.
- 『남도의 밤 식탁』, 작가, 2012.
* 어초장(시인의 서재)이 장마 후유증을 앓는다. 책에 습기가 배여 얼룩이 진 것이다. 그렇지만 책을 말리면서 그 책을 지나왔던 시절이 서늘하게 와 닿기도 했을 것이고, 자신 역시 가을볕에 기분 좋게 말려지는 예상치 못한 덤을 얻기도 한다.
주변의 풍경이나 사물도 새로 눈에 들어온다. 섬진강 물줄기는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한다. 무지개 보고 가슴이 뛰지 않으면 그때 나 죽게 하라는 워즈워스의 시가 문득 떠올려지는 장면이다. 또한 떫은 시절을 지나 무르익은 감나무의 감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너도 아름답게 익었구나, 그렇게 치사하고픈 마음이 섞여 있을는지 모른다.
시인이 거풍을 통해서 책만 말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기 안의 어둠과 습기만 제거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 더해 느슨한 것을 죄려는 마음이 그러하다. 더 느슨해도 좋겠지만, 팽팽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 시인에게 분명 있을 것이다.
깊어 가는 가을, 아무 생각 없이 바람을 쐬다 보면 혹 모를 일이다. 내게도 비밀스런 전언이 있을지.(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