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그리고 시
서동진, 팔레트 속의 자화상, 1930년대 초반
윤두서, 자화상 <국보 제240호 >
*윤선도의 증손자, 정약용의 외증조
자화상(自畵像)/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를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고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고흐, 귀를 자른 자화상, 1889
자화상/ 정 희 성
어느 천재 시인이 일필휘지로
하루저녁에 휘갈겨 쓴 시집 한 권을
읽고 읽고 또 소리 내 읽는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석 달 열흘이 걸려서야 다 읽었다
이 귀신이 필경
내가 미치는 꼴을 보고 싶겠지
낯선 거울 앞에서 나도
귀를 잘라버리고 싶다
이쾌대,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1948-49년 무렵
자화상/ 김용택
사람들이 앞만 보며 부지런히 나를 앞질러갔습니다.
나는 산도 보고, 물도 보고, 눈도 보고, 빗줄기가 강물을 딛고 건너는 것도 보고,
꽃 피고 지는 것도 보며 깐닥깐닥 걷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이 다 떠나갔지요.
난 남았습니다.
남아서, 새, 어머니, 농부, 별, 늦게 지는 달, 눈, 비, 늦게 가는 철새,
일찍 부는 바람,
잎 진 살구나무랑 살기로 했습니다.
그냥 살기로 했답니다.
가을 다 가고 늦게 우는 철 잃은 풀벌레처럼
쓸쓸하게 남아
때로, 울기도 했습니다.
아직 겨울을 따라가지 않은,
가을 햇살이 샛노란 콩잎에 떨어져 있습니다.
유혹 없는 가을 콩밭 속은 아름답지요.
천천히 가기로 합니다.
천천히, 가장 늦게 물들어 한 대엿새쯤 지나 가기로 합니다.
그 햇살 안으로 뜻밖의 낮달이 들어오고 있으니.
피카소,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1903
피카소, 자화상, 1972(91세 때 그림)
자화상/고은
내가 부른 노래
내가 부르지 못한 노래들이
우르르
불 켜들고 내달려오는
나일 줄이야
이 찬란한 후회가 나일 줄이야
렘브란트, 자화상, 1629
렘브란트, 자화상, 16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