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의 품삯 / 마경덕
노루의 품삯 / 마경덕
글쎄, 뒷산 노루가 농사를 지었다하네. 세 마지기 울타리 없는 고구마밭 귀 밝은 노루가 드나들며 씨알을 키웠다네. 깊은 밤, 마을이 깜박 졸 때 한 이랑 두 이랑 고구마순 야금야금 따먹고 농사를 지었다네. 잠 없는 발 잰 짐승이 참으로 극진히 고구마밭을 섬겼다하네. 무릎 꿇고 지은 입농사에 씨알이 굵어, 그해 농사
포대 포대 알토란처럼 재미를 봤다는데,
그러게, 이듬해 밭주인이 울타리를 쳤네. 고구마순이 사라진 민둥밭에 기둥 박고 그물치고 담을 둘렀네. 달빛도 새 울음도 넘지 못해 밭그늘이 날로 무성했네. 밤마다 어지러운 발자국만 남기고 노루가 돌아간 뒤, 시퍼런 넝쿨이 남실남실 고랑까지 기어갔네. 흐뭇한 넝쿨 걷어내고
드디어 두둑을 헐었는데,
실뿌리만 줄줄 끌려 나왔네. 땅 기운 다 빨아먹은 이파리, 밑은 허당이었네. 노루의 품삯은 이파리였네. 짐승에게 품삯을 아낀 농사는 암만,
헛농사였네.
- 『글러브 중독자』, 애지, 2012.
* 한 편의 우화 같은 시다. 노루에게 고구마순은 아주 절실한 것이었지만 밭주인에게는 고구마순은 그리 요긴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자기 것에 입을 대는 노루가 얄미웠나 보다. 노루만 없다면 더 큰 수확이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섰을 것이다. 밭주인은 울타리와 그물로 노루의 출입을 막았다. 노루는 막막했겠고 밭주인은 시원했겠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에 밭주인 역시 망연자실한다. 노루의 입을 피한 고구마순이 땅기운을 앗아가서 정작 고구마 씨알은 제대로 굵지 못한 것이다.
밭주인의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부른 셈이다. 연민이 없는 부, 나눌 줄 모르는 부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한다. 노동을 제공한 생산자에게 이윤을 돌리지 않고, 일방적인 양보만 요구하는 자본가가 있다면, “품삯을 아낀” 밭주인과 동색이라 할 것이다. 몇 대를 이어 부자로 행세한 가문의 첫째 비결은 혼자 배부르지 않고 곳간을 풀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에도 생각이 미친다.
밭주인에게 노루처럼 직접 이해관계가 없거나 설령 해가 되는 면이 있다 하더라도 가진 자와 힘 있는 자가 짐짓 너그럽게 넘어가는 여유가 있어야 이해당사자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삶이 풍요로워질 것이다.
“헛농사”는 누구든 지을 수 있다. 헛농사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철저하게 분석하고 반성하지 않으면 슬픈 우화는 언제든 다시 써 질 것이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