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1863~1944, 노르웨이)
뭉크 Edvard Munch(1863~1944, 노르웨이 )
아래는 박정은의 글이다.
[뭉크의 '절규'는 자신의 내면적인 고통을 잘 드러낸 작품으로 유명하다. '절규'의 배경은 다리 위의 거리지만, 사실은 뭉크 자신의 내면의 세계이며 자아의 모습이다.
뭉크에게 있어 그 장소(절규의 배경으로 추정되는 노르웨이 피오르드 해안)는 색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 장소 인근에는 정신병원이 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병원에서 종종 미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근처에는 방목장과 도살장도 있다. 뿐만 아니라 뭉크의 절친한 친구였던 칼레 로헨이 문제의 장소 근처에서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충격, 불안, 경악, 절망감으로 엄습한 '절규'에 대해 사람들이 호평하는 이유는 뭘까? 뭉크의 '절규'는 누구에 대한 절규였을까?
인간 내면의 공포와 절망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이 작품은 뭉크 자신이며 이 작품을 바라보는 '나' 자신이기도 하다. 언제 어느 순간 사람들은 한번쯤 절망감을 느낄 때가 있다. 작품 속 인물처럼 소리 지르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어둡고 불안정하며 우울한 인간사마저 포괄할 수 있는 게 바로 예술이다. 그런 측면에서 희망이나 기쁨 보다 절망과 두려움을 표현한 뭉크는 정말 유니크한 존재다. 어쩌면 이런 게 뭉크의 작품이 지닌 진정한 가치일지도 모른다. 기쁨보다는 슬픔, 환희 보다는 고통, 희망 보다는 절망, 불안함을 파고드는 게 바로 뭉크의 예술세계이다
뭉크의 작품들은 '남과여'(1898)나 '키스'(1897) 같이 남녀의 욕망이 두드러진 작품들조차 온통 검게 채색되어 있다. 나체로 남녀를 그린 '남과여'에선 에로틱한 느낌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암울한 현실에 낙담하듯 우울한 분위기다. '키스'에서도 남녀 간의 통상적인 애정은 느껴지지 않고, 키스를 하고 있음에도 알 수 없는 괴로움이 가득하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밤을 지새우거나 키스를 하고 있어도 사랑의 기쁨보다는 아픔, 즐거움 보다는 고통, 만남보다는 이별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는 게 뭉크의 작품들이다. 그래서인지 뭉크의 그림들은 보는 이들에게 편안함보다는 불편함을 준다. 이런 불편함 때문인지 그의 작품들은 전시회에 출품될 때마다 언론과 관람객들의 혹평을 견디지 못하고 철거되곤 했었다.
뭉크의 그림들이 어둡고 음침한 것은 어린 시절 그의 불행했던 가족사 때문이기도 하다. 뭉크가 다섯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했고, 열네살 되던 해에는 같은 질병으로 여동생 소피마저 사망했다. 뿐만 아니라 뭉크 자신도 갖가지 질병으로 어린 시절부터 병약했으며, 몇 년 후엔 다른 동생 안드레아스까지 사망했고, 또 다른 여동생 로라는 후에 우울증 진단을 받고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한마디로 집안 전체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든 그런 무섭고 고통스런 환경 속에서 뭉크는 유년기를 보냈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우울증과 강박관념에 시달렸다는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던 그의 불행한 가족사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뭉크에게 있어서 삶은 죽음과 경계선상에 놓인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다. 뭉크의 집안에 드리워진 그 악령과도 같았던 죽음으로부터 뭉크는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 어쩌면 그런 불안과 공포를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가 바로 그림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미술계와 관객들은 뭉크가 지닌 원초적인 트라우마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매일 죽음과 함께 살았다. 나는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두 가지 적을 안고 태어났는데, 그것은 폐병과 정신병이었다. 질병, 광기, 그리고 죽음은 내가 태어난 요람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천사들이었다."
어머니와 여동생들의 거듭된 죽음과 마주한데다, 뭉크는 훗날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유부녀와도 불행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여성은 고난이었고, 사랑마저 고통과 죽음이었다. 이것이 남녀를 다룬 그림에서조차 검고 어둡게 표현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절규'에는 뭉크가 세상을 알게 되면서 받았던 충격과 공포가 고스란히 집약되어 있다. 뭉크는 자신의 작품 세계에서 '절규'가 차지하는 비중을 깨닫고, 석판을 비롯한 여러 가지 버전으로 동일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오늘날까지 뭉크의 '절규' 만큼 '두려움'과 '공포'를 단순화시키고 또 극대화시켜 이렇게 노골적으로 묘사한 작품도 없다. 그것은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만이 그려낼 수 있는 극단적인 형태의 표현이다.
그래서인지 '절규'는 오늘날까지 여러 형태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또 끊임없이 패러디 되고 있다. 영화 '나홀로 집에'(1991) 포스터에서 맥컬리 컬킨은 '절규'의 표정을 흉내내고 있으며,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스크림'(1995)에 사용된 할로윈 가면 또한 '절규'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다. 이 밖에도 뭉크의 작품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포스터, 만화, 캐리커처는 셀 수 없이 많다. 뭉크의 상처받은 삶에서 비롯된 이미지들은 현대인의 불안한 심리와 연결되면서 20세기 이후 하나의 장르를 형성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아래는 김영태 글의 일부다.
[81살로 생을 마감한 에드바르 뭉크(1863- 1944년)는 평생 독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자식과도 같은 작품들을 오슬로 시에 모두 기증하였다. 그 덕에 후대 사람들은 방대한 그의 작품을 박물관에서 체계적으로 감상하는 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뭉크박물관에는 유화 · 판화 · 수채화 · 소묘 등 2만5천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략)
서경식 교수는 자신의 미술 에세이 ‘청춘의 사신’에 소개한 뭉크의 <생명의 춤>(이 기사 맨 위 그림)에서 여자로 인한 뭉크의 고통을 설명한다. “하지 축제가 열리는 밤, 남녀가 무아지경에 빠져 춤을 추고 있다. 왼쪽에는 하얀 옷차림의 순진무구한 소녀. 중앙에서 춤을 추는 붉은 옷차림의 여자는 성적으로 성숙한 ‘닳고 닳은 여자’이고 남자는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검은 옷차림의 초로의 여자가 실의와 체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채 우두커니 서 있다. 이 그림을 그릴 무렵, 뭉크는 여섯 살 연상인 툴라라는 여자와 골치 아픈 연인관계를 맺고 있었다. 붉은 옷차림의 ‘닳고 닳은 여자’는 툴라를 묘사한 것이다. 자유분방하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가진 툴라에게 뭉크는 성적으로 매료되면서도 끊임없이 마음이 어지러웠다. 뭉크는 툴라에게 쓴 편지에서 ‘당신은 향락의 복음을, 나는 고뇌의 복음을 손에 쥐고 있다’고 말한다.”
뭉크는 자화상에도 몰두한다. 그는 자화상을 그리면서 자신의 창작활동과 삶에 대한 태도를 드러낸다. 뭉크는 1895년 <담배를 쥔 자화상>과 같은 시기에 <지옥 속 자화상>을 완성한 이래, 1902년과 1906년 사이에 자화상 14점을 집중적으로 제작했다. 이후 1919년과 1926년에 자화상을 그렸고, 타계하기 4년 전인 1940년에 자화상을 여러 점 그려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자신을 보여주고 있다. 사망한 그 해에도 만년을 대표하는 자화상 두 점을 제작했다. 만년의 작품 중 <창문 옆에서>는 삶과 죽음, 수직과 수평, 움직임과 정적의 조화를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유명한 뭉크의 대표작 <절규>의 탄생 배경도 흥미로웠다. 이 그림은 자신의 경험을 1년 뒤에 작품화한 것이다. 1892년 1월 22일에 쓴 일기에는 “태양이 지는 시간에 친구와 길을 걷고 있었다. 하늘이 피처럼 붉게 물들고 검푸른 피오르드와 거리위로 불타는 구름이 드리워졌다. 나는 공포에 떨며 서있었다.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커다란 절규가 자연을 갈기갈기 찢는 것을 느꼈다.”고 씌어 있다. 남부 피오르드의 안쪽에 자리를 잡은 오슬로의 지형과 기후는 뭉크의 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북유럽 특유의 어둡고 길고 추운 겨울 저녁은 때로는 아름답지만 때로는 공포를 느끼게 하였을 것이다.(략)]
아래는 김성휘 글의 일부다.
[2012년 한국에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가 살아있었다면 사회는 물론 가족들에게도 버림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신경쇠약, 알콜 중독에 가까운 술고래, 술주정을 일삼고, 공황발작 증세까지. 1908년 그를 치료했던 야콥슨 박사는 "좋은 친구들만 사귀고, 사람 많은 데서 술마시지 말라"는 처방을 내렸을 정도다.
뭉크 하면 떠오르는 작품 '절규'가 2일(현지시간) 뉴욕 소더비 경매장에서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인 1억1990만달러(약 1355억원)에 팔렸다. 종전 최고가를 기록한 피카소의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약 1200억원)을 누른 것이다.
물론 예술품의 가치를 순전히 가격으로 매길 수는 없다. 뭉크가 지금도 인정받는 가장 큰 이유는 비극으로 점철된 인생의 한가운데서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모든 열정과 재능을 예술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후대는 그를 거장의 반열에 올리고 그의 작품을 걸작으로 평가한다.(략)
표현주의 작가 뭉크는 '절규'처럼 극단적인 감정을 그린 것 외에도 다채로운 작품을 남겼다. 초기 대표작으로는 '마돈나'(1895~1902), '멜랑콜리'(1891) 등이 있다. 신경질적이면서 음울한 모습을 담은 초상화는 뭉크의 내면을 잘 드러낸다.
오슬로 뭉크 미술관엔 노르웨이의 겨울 모습을 담은 다양한 풍경화, 각종 판화, 스케치 등이 소장돼 있다. 연작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도 인상적이다.
뭉크는 2차 세계대전 종전 1년 전인 1944년 1월 오슬로 인근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다행히 말년의 그에겐 어린 시절과 같은 극심한 가난은 없었다. 그는 "내 몸이 썩으면 그 위에 꽃이 피고 나는 꽃들과 함께 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