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눈 / 이사가

톰소여와허크 2013. 3. 8. 20:24

 

눈 / 이사가

 

멀고 먼 하늘에서부터

기어이 내 집 마당에 내렸으나

한 때 그 순수와 포근함도

손을 잡으면 사라지고 마는.

 

한 잠 자고 일어났더니

아직 눈이 오네, 바보처럼

많이만 사랑하면 되는 줄 알고

얼마나 무겁고 힘든지…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한없이 바라보다가, 돌아보니

문득 시간이 멈추고

내 홀로 여기 버려졌네.

- 『 구름이나 쳐다보는 하느님』, 나무아래서, 2012.

 

* 눈이 온다. 한 잠 자고 일어나도 눈이 온다. 눈(雪)을 지켜보던 화자의 눈(目)은 번쩍 뜨인다. 눈이 똑같이 내려도 예전의 눈이 아닌 것처럼 눈을 인식하는 화자 자신도 생면부지로 낯설게 느껴진다. 대개 이럴 때 깨달음이 온다.

  주워들은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인간을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불안정하고 불합리한 개인으로 본다. 인간은 가족을 이루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하며 보람을 얻는다. 그 과정에 이름과 직분을 얻기 위해서, 또 그 이름과 직분에 어울리는 처신을 하려고 무던히 애를 쓸 것이고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내 홀로 여기 버려졌”음을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물론, 시인이 이전의 사랑과 열정과 일을 부정하는 마음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많이만 사랑하면 되는 줄 알고/ 얼마나 무겁고 힘든지…” 라는 독백이 심금을 울린다.

  영화 <즐거운 인생>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내뱉는,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란 말은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에겐 무책임한 말로 인식되겠지만, 또 기꺼이 짊어지는 그 책임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기도 하겠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원했던 삶과 점점 멀어지고 우두커니 있을 자신과 마주칠 날도 있을 것이다. 한 잠 깊이 들기 전에, 아니면 깬 후에라도 사랑이라는 말로 서로의 꿈을 꺾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