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일화

박수근(1914~1965, 강원도 양구)

톰소여와허크 2013. 4. 10. 15:15

 

박수근(1914~1965, 강원도 양구)

 

아래는 정민영 님의 글이다.

 

[박수근은 이 땅의 서민들의 일상을, 이 땅의 질감으로 그려낸 가장 한국적인 화가다.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로 우리 산천의 이목구비를 실감나게 그렸듯이 박수근은 자신이 보고 느낀 서민들의 숨결을 토속적인 스타일로 그렸다. 그의 그림은 세련된 도회풍과는 거리가 멀다. 1950~1960년대 이 땅의 평범한 풍경과 서민들의 삶을 질박한 색채와 기법으로 승화시켰다. 특히 화강암 재질을 살린 투박한 마티에르 기법은 박수근이 일궈낸 가장 한국적인 조형언어로 평가받는다. 박수근 그림의 주요소재는 '나목'과 '여인'이다. 재산이라고는 '붓과 팔레트밖에' 없었던 그는 과연 누구를 모델로 한국적인 여인상을 창조했을까?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양구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이 정규교육의 전부다. 당시 유명한 화가들은 대부분이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하여 해외유학을 다녀온 '유학파'들이다. 반면에 가난하게 성장한 박수근은 순수 국내파다. 그것도 독학으로 미술에 입문한 토종이었다. 열악한 조건은 오히려 '약'이 되었다.

그는 해외에서 유행하던 최첨단 미술사조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살던 시대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흔한 풍경과 사물과 주변 사람들을 그렸다. 그의 풍경과 정물과 인물은 당시 흔하게 만나는 정겨운 것들이다.

이런 점은 화실 안에서 여인의 누드나 인물좌상 등을 그리던 다른 화가와 뚜렷이 구별된다. 특히 인물들은 아이를 업은 여인과 소녀, 머리에 짐을 이거나 빨래를 하는 아낙네, 놀고 있는 남자와 아이들이 주인공이었다. 한결같았다. 평생 소재의 진폭이 없었다. 피카소처럼 청색시대, 분홍색시대 운운하며 작품을 시기별로 나누는 방식이 그에게는 무의미했다. 끊임없이 일상의 풍경을 그렸을 뿐이다.

인물들을 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노는 남자와 일하는 여자로 뚜렷이 구분된다는 점이다. 남자들은 한결같이 '백수' 같은 포즈다. 먹고살기 위한 노동과 무관해 보인다. 쪼그리고 앉아서 시간을 죽인다. 반면에 여자들은 아이를 업거나 손을 잡고 머리에는 무엇인가를 이고 있다. 또 아이를 업고 절구질을 하거나 빨래를 한다. 가족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2중 3중으로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여인들은 누구를 모델로 삼은 것일까? 거리에서 만난 이 땅의 여인들이었을까? 맞다. 하지만 절반만 맞다. 특별한 모델이 있었다. 그에게 빛을 준 사랑하는 아내(김복순)였다. 박수근이 처녀 김복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내가 이제까지 꿈꾸어 오던 내 아내에 대한 여성상은 당신과 같이 소박하고 순진하고 고전미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당신을 꼭 나의 배필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아내에게서 발견한 한국의 여인상을 박수근은 그림으로 승화시켰다. '맷돌질하는 여인'(1940년대)과 '절구질하는 여인'(1954)이 직접 아내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라면, '나무와 두 여인'(1962)은 아내의 모습을 전형화시킨 여인들이다. 이 그림에는 나목을 사이에 두고 아이를 업은 여인과 머리에 짐을 인 여인이 등장한다. 아이와 일은 당시 여인들의 숙명이었다.

가난이 일상이던 시절, 아내는 낮부터 밤 12시까지 고된 일을 하거나 뜨개질로 푼돈을 모았다. 그렇게 모은 돈을 털어서 화구도 사고 정물화에 필요한 꽃도 사왔다. 때로는 사정이 급하면 시집올 때 가져온 옷감까지 팔았다. "우리 모두의 유일한 소망은 그이가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로 대성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되도록 전력을 기울여 내조하는 일이 나의 임무였다." '화가 박수근'의 뒤에는 이런 아내가 있었다. 그는 아내의 내조 덕분에 화가로서 꿈을 펼칠 수 있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아내의 모습을 다양하게 변주한 것이지만 그것은 궁핍한 시대를 살다간 여인들의 초상이기도 하다. 그들은 날씬한 몸매의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다. 시골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펑퍼짐한 아줌마들이다. 그것도 노는 여인이 아니라 '일'하는 여인이다. 그들은 가난으로 고통스러워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가난과 맞서며 가정을 지키고 자식을 키웠다. 그의 아내가 그랬듯이.

 

박수근은 가장 서민적인 화가로 꼽힌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화가의 꿈을 버리지 않고 독학으로 예술세계를 완성했다. 단색조의 투박한 마티에르에는 항상 따스한 시선으로 발효시킨 서민의 생활이 펼쳐진다. 그 중심에 여인들이 있다. 그 여인은 이 땅의 보통 여인들처럼 '뼈빠지게' 일했던 아내의 모습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박수근의 그림은 '헌화가(獻畵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박하고 순진하고 고전미를 지닌' 아내에게 바치는 헌화가 말이다. 그림은 박수근이 그렸지만, 그를 화가로 키운 것은 아내였다.]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당시 넉넉했던 집안 형편은 그가 보통학교에 들어갈 즈음 어려워졌고 그 이후로는 계속 가난으로 인한 고단한 삶을 살았다. 12세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은 화가가 되고자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계속하여 18세인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에서 수채화 <봄이 오다>로 입선을 하게 되었고 이후 거듭 선전에서 입선하였다. 화가로서 그의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6·25동란 후 박수근은 한동안 미8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주고 그 대가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후 국전에 수 차례 입선과 특선을 하였고 이때부터 가난한 이웃을 소재로 하여 평면적이고 독특한 마티에르(질감)를 가진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 나갔고 화가로서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1957년 심혈을 기울여 그린 대작 <세 여인>이 국전에서 낙선한 것에 크게 낙심한 나머지 과음을 계속하여 백내장으로 한 쪽 눈을 실명하게 되었고 간경화도 심해졌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계속 작업을 해갔으나 건강이 더욱 나빠져 1965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이것은 박수근 자신의 철학과 그림에 대한 생각이 담긴 유일한 말로 여기에서 그의 작품의 주제와 특징의 근간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박한 우리네 서민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일하고 있는 여인이나 장터의 풍경, 할아버지와 손자 등 생각만으로도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그들을 박수근은 그리고자 하였다.

그들의 '선함과 진실함'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화강암의 거친 질감을 화폭에 옮겨왔고 그 위에 공간감을 무시하고 극히 단순한 형태와 선묘를 이용한 평면화 된 대상을 모노톤의 색채로 그려내어 마치 바위에 각인된 듯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렇게 표현된 그의 작품에서는 숭고한 기운마저 느껴진다.

박수근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였고 서구예술을 접할 기회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불리한 상황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계속 실력을 쌓아간 것이 오히려 그 자신만의 시각과 표현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가장 한국적인 화가가 된 것이다.

 

아래는 문소영 기자의 글이다

 

[박수근과 박완서. 지금부터 61년 전 이맘때, 서울대에 갓 입학한 여학생은 꿈과 자부심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곧 터진 한국전쟁으로 학업은 고사하고 전쟁 통에 죽은 오빠 대신 가족을 먹여살려야 했다. 그녀는 간신히 미군 PX 초상화 가게에 취직했다. 지나가는 미군을 붙잡고 “돼먹지 않은 영어로” 가족이나 애인 초상화를 주문하라고 꾀는 일이었다. 그 일의 모멸감 때문에 그녀는 점점 성격이 황폐해지면서 가게 화가들에게 화풀이를 하곤 했다. 이때 한 순하고 과묵한 화가가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두 사람은 곧 친구가 됐지만, 서로가 뒷날 한국 문단과 화단의 큰 별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소설가 박완서(1931~2011)와 화가 박수근(1914~1965)의 이야기다.

올해 초 타계한 박완서 작가는 바로 자신의 PX 경험담을 바탕으로 데뷔작 『나목(裸木)』(1970)을 썼다. 이 소설에 나오는 화가 옥희도는 박 화백을 모델로 한 것이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옥희도의 그림 ‘나무와 여인’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박 화백의 실제 작품으로, 지난해에 열린 그의 45주기 회고전에 전시되기도 했다.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이렇게 그림 속 나무를 묘사하며 박 작가는 옥희도가, 즉 그 모델이 된 박 화백이 나목과 같다고 했다. 전쟁의 비참한 시대, 미군에게 싸구려 초상화를 팔아 연명하면서도 담담한 의연함을 잃지 않던 모습에서 말이다.

  그런데 박 작가의 PX 생활과 박 화백과의 만남은 소설 『나목』에서보다도 수필 ‘박수근’(1985)에서 한층 더 흥미롭게 묘사돼 있다. 허구가 가미되지 않은 사실이 지니는 날것 그대로의 생생함, 그리고 그것을 짧은 수필에 날렵하고 감칠맛 나고 박력 있게 풀어낸 박 작가의 더욱 원숙해진 글솜씨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박 작가는 당시 PX 초상화 가게에 박 화백을 포함한 대여섯 명의 “궁기가 절절 흐르는 중년 남자들”이 일하고 있었다고 묘사한다. 모두 간판 그리던 사람들이라고 가게 주인이 말하기에, 박 작가는 그런 줄 알았다고 한다. 그녀는 여기서 초상화 주문 끌어오는 일을 했다. 처음에는 수줍고 꽁한 성격에 말문이 열리지 않았으나 주문이 끊긴다는 화가들의 아우성에 (이때도 박 화백은 아우성에 동조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내 미군에게 “뻔뻔스럽게 수작을 거는” 수준에 이르게 됐다. 그래서 그림 주문이 늘어나자 이번에는 화가들에게 ‘싹수없이 못되게 굴었다’.

 “서울대 학생인 내가 미군들에게 갖은 아양을 다 떨고, 간판쟁이들을 우리나라에서 제일급의 예술가라고 터무니없는 거짓말까지 해가며 저희들의 일거리를 대주고 있는데, 그만한 생색쯤 못 낼게 뭔가 싶었다. 나는 그때 내가 더 이상 전락할 수 없을 만큼 밑바닥까지 전락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불행감에 정신없이 열중하고 있었다.”

 

 

 혹자는 박 작가가 전쟁의 쓴맛을 덜 봐서 학벌 타령을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와 가족들은 전쟁이 발발했을 때 피란을 가지 못하고 인민군과 국군이 번갈아 점령한 서울에 남아 있으면서 죽을 위기를 이미 몇 차례 겪었다.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전쟁의 현장에서도 스스로를 포기할 수 없던 젊은 영혼은 순수한 긍지가 변질된 추한 우월감이라도 붙잡고 있어야 했으리라. 그 자괴감 섞인 우월감으로 더 불행해질망정.

 그 불행에서 박 작가를 구해준 것이 박 화백이었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의 화집을 가져와 ‘망설이는 듯한 수줍은 미소’를 띠며 관전(官展)에서 입선한 그림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시골 여인이 절구질하는 그림이었는데, 박 화백은 전후에도 이 소재로 종종 그림을 그렸다

 박 작가는 간판쟁이 중에 진짜 화가가 섞여 있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박 화백은 왜 그림을 보여주는지 설명이 없었고, 그 뒤로도 여전히 조용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가 신분을 밝힌 것은 내가 죽자꾸나 하고 열중한 불행감으로부터 헤어나게 하려는 그다운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내 불행에만 몰입했던 눈을 들어 남의 불행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중략) 그에 대한 연민이 그 불우한 시대를 함께 어렵게 사는 간판쟁이들, 동료 점원들에게까지 번지면서 메마를 대로 메말라 균열을 일으킨 내 심정을 축여 오는 듯했다.”

 이 에피소드는 박 작가의 자전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에도 나오는데, 박 화백의 배려가 언 몸을 녹여주는 따뜻한 물 같다고 쓰여 있다. 화가의 성품이 자기 작품과 딴판인 경우도 많건만 박 화백은 자신의 그림을 그대로 닮았던 모양이다. 그의 그림은 색채 톤이 과묵하고, 그 오래된 화강암의 표면 같은, 또는 갯벌의 흙 같은, 또는 늙으신 어머니의 손등 같은 질감에 인고의 무게와 따스한 체온이 배어 있다.

 그 후 두 사람은 박 작가가 결혼을 해 PX를 그만둘 때까지 1년가량 우정을 이어갔지만 소설 『나목』에서처럼 연애 감정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수필 끝부분에서 박 작가는 그녀의 눈에는 살벌하게만 보이던 겨울나무가 박 화백의 눈에 “어찌 그리 늠름하고도 숨쉬듯이 정겹게 비쳤을까” 신기하다고 했다. 그건 박 화백이 “나는 인간이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자신의 말을 실천했기 때문이리라.

 타인과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가장 추하고 악한 면을 적나라하게 보게 되는 전쟁, 그러나 그 안에서 한 줄기 희망과 위안을 주는 것도 역시 인간이라는 아이러니를 박 작가의 이야기와 박 화백의 그림은 오늘날에도 절절히 말해주고 있다.

 

  한국전쟁은 박완서 작가가 수많은 작품을 낳게 한 원동력이었다. 이 중 논픽션에 가까운 자전적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한국전쟁의 미시사적 자료로도 손색이 없다. 이 작품을 보면 1·4후퇴 때 서울에 온 인민군은 시민의 굶주림 문제는 아랑곳없이 선전예술 공연과 우파 색출에만 골몰하고 북으로 철수할 때는 노인들은 따라가길 원해도 거부하고 젊은 사람들은 강제로 끌고 갔다. 박 작가는 이때 끌려가다 용케 탈출했다. 또 6·25 발발 때 시민을 내버려 두고 먼저 도망친 남한 정부는 돌아와서는 인민군에게 밥해줬다는 이유로 숙부를 빨갱이로 몰아 처형했다. 이때의 경험이 작가가 전후에 어느 쪽 이념에도 쏠리지 않고 인간을 직시하는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