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사라진 숨구멍 / 장하빈

톰소여와허크 2013. 4. 12. 16:04

 

사라진 숨구멍 / 장하빈

 

  동네 어귀 갈림길에 아름드리 느티나무 서 있었습니다.

  터줏대감 김 노인 갑자기 세상 버리자, 이듬해부터 새잎 달지 못하고 행려병자처럼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진눈깨비 오던 날이었지요. 온 동네 집어삼킬 듯 포클레인 밀고 들어와 돌무지 헤치고 난리 치더니, 당산 지키던 느티나무 뿌리째 뽑혀 덤프트럭에 실려 가고 말았습니다. 수백 년 살아 숨 쉬던 마을 숨구멍이 삽시간에 사라진 게지요.

 

  밤마다 잦은 눈보라 속, 느티나무 혼령이 마실을 돌아다녔습니다.

  - 저, 천하에 몹쓸 것이 농사일 마다하고 향리도 버린 그놈이여! 전답 팔아넘기려고 지 애비 독살시킨 거여!

  꿈자리 어지러운 새벽녘, 자국눈 밟으며 골목 빠져나와 느티나무 서 있던 우멍한 자리에 까치발로 서성거렸지요. 눈 속에 허옇게 말라죽어 가던 느티나무, 그 수만 가지 움켜잡고 있던 허공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 『까치 낙관』, 시와시학, 2012.

 

*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이면서 마을 사람들과 손님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웠을 정자나무였겠다.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마을 사람의 소원도 듣고, 대소사도 봐 왔을 느티나무인데, “터줏대감 김 노인”의 죽음 이후 공교롭게 “새잎 달지 못하고” 병치레한다. 김 노인이 비명횡사한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김 노인의 죽음을 좀 더 크게 받아들이면 이후 세대와의 불화와 단절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사소한 갈등일랑 마을의 어른에게 가져가고, 마을의 어른은 더 큰 어른인 당산나무에게 가져가서 문제를 해결해 왔던 게 지난 시절의 공동체 모습이지만 지금은 어른에게도 나무에게도 더 이상 기대지 않는다. 노인은 쓸쓸해지고 나무는 영험함을 잃었다.

  “수백 년 살아 숨 쉬던 마을 숨구멍”이 아주 닫히기 전에 마음에 나무 한 그루 심었으면 한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