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아내는 언제나 한 수 위/ 서정홍
톰소여와허크
2013. 6. 26. 09:03
아내는 언제나 한 수 위/ 서정홍
영암사 들머리
신령스런 기운이 돈다는
육백 년 넘은 느티나무 밑에서
아내한테 말했습니다.
“여보, 이렇게 큰 나무 앞에 서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져요.”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일 년도 안 된
작은 나무 앞에 서 있어도
저절로 머리가 숙여져요.”
-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보리, 2012.
* 수백 수령의 고목을 보자면, 넉넉하고 여여하고 푸근한 품새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우선 든다. 한 자리에서 붙박인 채 숱한 사연을 간직하고 갖은 풍상을 지나왔을 것을 생각하면 백 년을 채 못 사는 사람으로서 삼가 경의를 표한 데도 이상할 게 없다.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는 화자의 말에 십분 공감하는 이유다.
하지만 자그만한 애기 나무 앞에 고개 숙인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아내의 말을 화자가 바로 인정했듯이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세상에 머리를 내민 어린것들, 가만히 쳐다보며 생명 가진 것의 신비함에 골똘한 적 왜 없겠는가. 영암사지 고목 아래 성냥개비처럼 올라오는 애기 느티를 쪼그려 앉아 보던 옛 기억도 살아난다.
작은 것과 눈을 맞추려면 머리 숙여야 하는 게 당연하다. 그 당연한 것을 여직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다. 자연의, 있는 그대로의,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고 감사해하는 마음가짐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내를 고수로 인정하는 시인의 마음처럼.(이동훈)
2012년 5월, 영암사지 앞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