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슬픔 / 강연호
건강한 슬픔 / 강연호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라는 안부를 건넬 틈도 없이
그녀는 문득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저 침묵했다
한때 그녀가 꿈꾸었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나도 그때 한 여자를 원했었다 그녀는 아니었다
그 정도 아는 사이였던 그녀와 나는
그 정도 사이였기에 오래 연락이 없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는데 서로 멀리 있었다
전화 저쪽에서 그녀는 오래 울었다
이쪽에서 나는 늦도록 침묵했다
창문 밖에서 귓바퀴를 쫑긋 세운 나뭇잎들이
머리통을 맞댄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 나뭇잎은 나뭇잎끼리 참 내밀해 보였다
저렇게 귀 기울인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바람과 강물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리라
그녀의 울음과 내 침묵 사이로도
바람과 강물과 세월은 또 흘러갈 것이었다
그동안을 견딘다는 것에 대해
그녀와 나는 무척 긴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
아니 그녀나 나나 아무 얘기도 없이
다만 나뭇잎과 나뭇잎처럼 귀 기울였을 뿐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나보다는 건강하다는 것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울음을 건넬 수 있다는 것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
그녀는 이윽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나는 혼자 깊숙이 울었다
- 『기억의 못갖춘마디』, 2012, 중앙북스(주)
* 사람 사이 관계라는 것이 깊이 알면 불편해질 때가 있다. 그 불편함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거나 수용한다면 필시 가족이거나 아주 가까운 사이일 게 분명하다. 이 부류에서 조금 벗어나면 ‘조금 아는 사이’, 멀리 벗어나면 ‘잘 모르는 사이’가 될 것이다. 이 중 서로 인사하고 소통하면서도 크게 부담이 되지 않는 관계가 ‘조금 아는 사이’(위 시의 “그 정도 아는 사이”)일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정도 사이”의 그녀가 전화를 걸어오더니 울음을 통해서 비밀스런 속내를 내비친다. 이제 그런 그녀와 조금은 불편하고 약간은 특별한 사이가 될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속을 꼭꼭 감추고 적당한 위장이 처세의 방편이 되는 현실에서 후회, 상처, 콤플렉스, 분노 등의 감정이 내면으로만 쌓인다면 겉은 멀쩡해도 건강하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녀는 울음으로 이런 감정의 찌끼를 밖으로 내고 한결 가벼워지고 씩씩해질 것이다. 전화 이편의 사람도 그녀의 울음이 건드린 뭔가에 의해서 울음을 따라한다. 자신 내부의 쓸데없는 방어벽을 깨고 후련해지는 기분일 것이다.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사람 사이, 슬픔은 나눌수록 건강해진다. 만약, 슬픔을 표현하지 못하고 슬픔을 수용하지 못하고 슬픔을 위로하지 못할 것 같으면, 그 사회는 병이 치명적으로 깊다고 해야 할 것이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