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 이하석
가야산 / 이하석
계류와 더불어 칭얼대며 내가 숨긴 길. 동굴의 숲 가엔 얼레지꽃들이 고개 숙인 채 나의 그림자를 응시한다.
그 짧은 생애들의 외롭고 강렬한 눈길 따돌리며 산등성이에 올라서자 조릿대숲이 앙칼지게 울며 열린다. 큰 바람이 내 욕망을 뒤집느라 웅성거린다.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다.
바람의 칼날이 조각하다 부러뜨린 나뭇가지 끝에 간밤에 눈이 얼리고 간 내 꿈이 싹트고, 산정에서 뒤엉키는 내 마음의 사나운 구름.
- 시선집 『환한 밤』, 시와반시, 2012.
* 가야산은 최치원이 말년을 보낸 은거지다. 비온 후 계곡물이 불자, ‘사람의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버렸네’(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중)라고 노래했던 곳이다.
거듭되는 실망의 시간을 지난 후, 최치원은 세상으로 내려갈 마음을 아예 접었을 것이다. 세상이 그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가 크겠지만, 최치원은 자신의 의지로 세상과 단절한다고 말한다. 그게 그의 자존심이었을지 모른다.
위 시의 주인공은 삶의 그늘 같은 “그림자”와 내면의 들끓는 “욕망”을 가지고 가야산에 왔다. 그런데 자신이 얼레지꽃을 읽는 게 아니라, 얼레지꽃이 자신의 그늘을 읽고 있단다. 이처럼 그늘이란 건 서로 곁을 쬐면서 위로 받는 것일 테다.
그늘과 다르게 욕망은 산정으로 오를수록 더 첨예하게 부대끼게 된다. 현실에서 가져온 것이되, 그 사나움은 전혀 잦아들지 않는다. 그런 중에도 “부러뜨린 나뭇가지 끝”의 “꿈”을 말한다. 극점에 다다른 느낌이지만 그것이 곧 새로운 기점이 되리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최치원은 가야산을 종점으로 여겼지만, 시인은 가야산을 내려갈 것이다. 다만, “아직”은 아니라는 말, 그 속에 가야산의 바람소리를 지금인 양 생생하게 그리게 된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