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 / 서규정
느낌 / 서규정
독서광도 아니면서, 버스 손잡이에 매달려 몇 장 넘기다
기사님이 급브레이크 잡는 바람에
옆에 선 삼십대 여성의 가슴을 더듬는 꼴이 되었죠
오싹, 성추행법으로 몰릴까봐
입술을 덜덜 떨며 바라볼 수밖에요
복잡한 차중에선 그럴 수도 있다는 듯이
타는 가뭄 쩍쩍 갈라진 논바닥 위로 비구름 지나가듯이
살짝 깨무는 미소도 보았고요
그러면서 또 간간이 생각나는, 뭉클한 느낌을
책이라고 부르면 안 되나요
백년을 바라고 두고두고 읽을거리
분량이 하도나 많아서 읽고 읽다가
접어둔,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 책 무덤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 『그러니까 비는, 객지에서 먼저 젖는다』, 작가세계, 2013
* 버스 기사의 도움으로 여성에게 크게 실례를 했지만 “살짝 깨무는 미소”로 이해를 받았으니 다행이다. 아니, 그때의 “느낌”은 심심한 인생사에서 간혹 살아나기도 하는 덤이 될 터니 이런 행운이 없다.
생뚱맞게 시인은 이 느낌을 “책”이라 부른다. 웬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백년을 바라고 두고두고 읽을거리”란 말에 수긍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머니의, 아내의, 사랑하는 사람의, 모르는 사람의 젖무덤에 같이 출렁하며 현기증 내다가 무덤으로 가는 게 한 생일 테니 말이다.
책을 욕심내며 평생을 파고들어도 책의 일부도 지나지 못하는 것처럼, 상대 성(性)의 “뭉클한 느낌”도 암만 파고들어도 자기 식으로 재단할 뿐 결국 파헤치지 못하고 지날 것이다. 그럼에도 “책”이, “뭉클한 느낌”이 가난한 자의 양식인 것을 어찌 부정하랴.(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