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강 / 강해림
붉은 강 / 강해림
동지섣달이었나 한밤중에 오줌이 마려워 마루 끝에 놓여 있는 요강 뚜껑을 열다 말고 무심코 들여다본 속이 벌겋다 아버지가 거기다 대고 각혈을 했나 달님이 몰래 달거리를 해놓고 갔나 하얀 사기요강이 달님 엉덩이처럼 차고 우련한데, 암튼 오줌도 못 누고 잠자리에 누우니 천장이 온통 붉은 강이더라 무서워 이불을 뒤집어쓰면 건넌방에서 들려오는 아버지 기침소리, 귀를 틀어막아도 들리는 콜록콜록 붉은
저 꽃모가질랑 잘라 숨통을 끊어버리고 싶어 가래 끓는 소리 가릉거리는 꽃잎 속에는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의 비명횡사가 있고, 콜록콜록 숨찬 아버지의 귀갓길이 있고, 아버지의 자수성가가 꽃처럼 서러워서 아름답더라 참나리 노랑하늘타리 맥문동 물달개비 가막사리 골무꽃 광대수염 미역순나무 애기땅빈대 이삭여뀌 자금우 모싯대 박주가리 끈끈이주걱 덩굴광대수염 손바닥난초 뽕나무 마가목 꿀풀 둥글레 석잠풀…… 폐병에 좋다는 것들 약탕기에 넣고 달이는 냄새로 진동하는 봄날 막 달거리가 시작되고, 나도 병 하나 얻었더라
가슴이 콩콩 뛰고 얼굴이 새빨개졌지 그 애를 보면,
- 『그냥 한번 불러보는』, 문학의전당, 2014.
* 요강에 받은 아버지의 각혈도, 콜록콜록 터지는 아버지의 기침소리도 온통 붉은색이 되어 어린 화자의 삶마저 “붉은 강”으로 물들여 놓았다.
꽃잎에 유독 붉은색이 많은 것은 벌 나비를 불러서 어떻게든 2세를 남기려는 생존 전략이라고 하니, 아름다움의 이면에 속 타는 사연과 간절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폐를 앓는 아버지, 그로 인한 불안과 걱정, 온갖 꽃이 든 약탕기로 이어지는 가계의 이야기도 한때의 간절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젠 지난 일이 되어 언제든 붉게 되살아나는 그리움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생이 저물면, 또 한 생이 시작되는 법이다. 달거리로 어른이 되어가며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할 때 붉게 번지는 한 점 기억이 떠올려질 텐데 어쩜, 그걸 시(詩)라고 부르면 안 될까?(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