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른다 / 김경주
아무도 모른다 / 김경주
엄마가 치마를 마당에 벗어놓고 사라진 날
나는 처음으로 치마를 입고
이상한 나라의 미소를 알아본다
처음으로 엄마가 남의 집 대문을
몰래 따고 있을 때
그 집엔 당신 말고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아요
나는 엄마를 백일째 기다리다가
싱크대 밑으로 들어가
녹아버린 눈 같아요
엄마가 눈 위에 오줌을 눈다
얘야 날 왜 지붕 위로 데려왔니?
여긴 엄마의 흰 머리칼이
하늘로 다 날아갈 때까지 바람이 부니까요
눈이 내리면 나는 노트 위에 물을 그려요
누구의 일부라도 될 수 있는 물을
그런 말 마라 네 몸엔 분명
내 몸의 일부만 흐르고 있다
오랜만에 한 베개에 나란히 누우니 좋다
그런데 얘야 네 흰 머리칼 냄새 때문에
도무지 잠을 못 자겠구나
슬픔이 조금 모자라도 나는 길게 이어진다
당신의 치마 속으로 들어간
수십만 그루의 촛불들이 술렁인다
흰 구름의 일부처럼 당신은 인파 속에 잠들어 있다
대문을 열어두고
나는 당신을 찾으러 간다.
당신이 더 이상 나를 못 알아보는 날부터
아무도 모른다
당신이 알아보는 나는
- 김경주, 『고래와 수증기』, 문학과지성사, 2014.
* 일본 영화, <아무도 모른다>(2004)는 버림받은 4남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했단다. 출생 신고도 하지 못한, 전셋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없는 것처럼 자란 아이들과 새 애인이 생겨 집을 나가는 어머니가 등장한다. 시인은 이 영화에서 시의 모티브를 얻었을 개연성이 있다. 어떤 사건이 문제적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무관심으로 아무도 모르는 일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이 사소한 일이든 큰일이든, 희극적이든 비극적이든 그냥 지나쳐가는 것을 멈추게 해서 거기에 유의미한 무언가를 남기는 게 시인의 과제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시인의 시는 이야기를 지니고 있지만 그 이야기를 친절하게 들려주지 않기에 독법에 어려움이 있다. 엄마가 사라진 날, 나는 엄마를 기다리다가 “녹아버린 눈”처럼 되고, “누구의 일부라도 될 수 있는 물”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다가 결국, 엄마를 찾으러 간다는 서사를 이 시는 갖고 있다. 엄마는 그리움의 대상이자, 어디든 스미고 싶은 마음을 인정받고 싶은 존재다. 하지만 엄마는 나의 요구를 흔쾌히 수용하지 않고 살짝 불편해 하기도 한다. 나와 엄마와의 거리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불화와 갈등의 연속인 세상의 한 단면이며 그런 와중에서도 스스로 노력해야 할 이유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이 세상에서 나와 당신은 서로 부대끼며 산다. 나는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알려고 하고 더러 아는 척하는 건 요긴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럼, 나는 당신을 좀 안다고 할 수 있나? 당신은 이런 나를 알아보는가? 그런가, 아닌가를 거듭 묻는다면 답해야 하리. 아무도 모른다고.(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