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비명(碑銘)/ 황인숙

톰소여와허크 2014. 5. 24. 09:06

비명(碑銘)/ 황인숙

 

 

그 여자는 반듯하게

편히 누어도 좋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녀 가슴 위에 공책 한 권.

그리고 오른손에 펜을 쥐어

포개어 놓으라.

 

비바람이 뚫고 햇살이 비워낸

두개골 속을

맑은 벼락이 울릴 때,

그녀 오른팔 뼈다귀는

늑골 위를 더듬으리.

행복하게 삐거덕거리며.

 

- 시선집『꽃사과 꽃이 피었다』, 2013, 문학세계사.

 

  * 이용악의 시에서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그리움>에서)라는 구절이 사무치게 좋았다. 바람벽이 구실 못하는 추위 속에 잉크병을 녹이며 손에 입김을 모으고 무언가를 쓰고 있는 모습이 선하게 연상되어서 일 것이다. 박경리의 유고 시집에서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옛날의 그 집>에서)다는 구절도 기억에 남아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두 사람이 잘 보여준 게 아닌가 싶다.

  위의 시도 그렇다. 시인의 미리 쓰는 묘비명처럼 보이는데 묘비명에서 묘를 굳이 뺀 것은 평소 가슴에 새겨두고 틈틈이 스스로에게 다짐을 둘 요량이 아니었나 싶다. 그 다짐은 펜을 들어 글 쓰는 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죽어서도 공책과 펜이 있던 “늑골 위를 더듬”고 “행복하게 삐거덕거리”고 싶다는 구절에서 책 읽고 글 쓰는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빗돌의 글이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글 쓰기가 시인을 가두고 힘들게 하는 것보다 그를 자유롭게 하는 힘이 더 강해서 일 것이다.

  또 주말이다. 마음에 새길 글 하나 고민해 봐야겠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