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기 / 함순례
순례기 / 함순례
그러니까, 술래라 불린 적 있다 기일게 수울래 부르면 달빛 강변에서 강강수울래 춤추는 듯, 좀 짧게 부르면 술래야 술래야 머리카락 보일라 숨은 동무들 찾느라 해거름 길어졌다 해례야 달례야 부르는 벗들도 있다 벗들에게 빛 같은 존재가 되라는 의미겠는데 온몸 붉어지는 호명이다 수레라고도, 순네라고도, 첩첩 산골 가시내가 되었다 미소가 둥글어졌다 글 냄새 물씬 나는 필명도 잠깐 생각했지만 지금 나는 태아 적 이름으로 돌아와 있다 들판을 한없이 걸어야 하는 순례에 서 있다 보은 회인 용촌리 백삼십육 번지 일천구백육십육 년 일월 스무여드레 그 하늘에 다시 예를 갖춰야겠다 삼보일배, 슬픈 낙타 발굽 소리와 모래바람의 숨통을 열어봐야겠다
- 『혹시나』, 도서출판 삶창, 2013.
* ‘순례’라는 이름에서 당사자가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첩첩 산골 가시내”의 순한 내가 난다. 특히 순례(順禮)라는 단어는 절대자나 이웃에 순응하는 느낌을 주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 땅의 순례들은 동무를 위해 기꺼이 ‘술래’가 되어줄 것 같은, 다른 누군가를 위해 착한 ‘순네’로 살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순례’라는 이름은 “들판을 한없이 걸어야 하는” 순례자(巡禮者)를 연상하게도 한다.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나는 구도자나 여행자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다. 시인이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삶을 결부시키며 자긍심을 갖는 대목도 여기다. 자신의 뿌리를 존중하면서도, 거기 머무르지 않고 길로 나서려고 한다. 삼보일배로 성심껏 나아가려는 모습이라든지 그 끝에 대한 설계보다는 모래바람 속을 생각하고 있는 데서 인생이란 길을 대하는 시인의 진중함과 깊이를 엿보게 된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