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가장 어두운 마을의 잠 / 고성만

톰소여와허크 2014. 7. 6. 21:57

마리 로랑생, <기타를 든 여인 >

 

가장 어두운 마을의 잠 / 고성만

 

양귀비 꽃잎 같은

해가 지자

캄캄하게 저무는 마을

 

너덜거리는 지붕

덜컹거리는 창문 곁을 지나는 중

무너지기 직전의 집에서 슬피 우는 소리 들렸는데

나도 언젠가

흑단의 상자에 손 집어넣어

반질반질 윤기 나는 어둠을 만진 적이 있다

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방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본 적이 있다

 

해가 멀고 먼 주소를 돌아 돌아오는 동안

 

시든 댕댕이덩굴 위

마리로랑생의 그림처럼 뜨는 달

하얀 얼굴 검은 눈동자가

옛날 이 집에 살던 소녀인가

소녀를 따라온 가족인가

수저 젓가락 딸그락거리는 소리

주전자의 물이 끓는 소리 몇 개 별을 주워

돌아갈 준비가 된 나는

 

초롱꽃 봉오리 품고

깊이 잠든다

- 『햇살 바이러스』, 시로여는세상, 2013.

 

  * 마리 로랑생의 연인이었던 아폴리네르는 그녀와의 이별을 슬퍼하며,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그러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미라보 다리>중에서)라는 명시를 남겼다. 인용한 아폴리네르의 시는 “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방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본 적이 있다”는 시인의 시구절과 묘하게 대응되고 있다. 가장 어두운 방에서 가장 진정성 있는 소리가 나오는 이치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아폴리네르의 죽음 이후, 로랑생은 가장 불행한 여자를 잊혀진 여자라는 말을 남겼지만, 그녀는 잊히지 않았고 검은 눈동자의 그림들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사랑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상(李箱)은 절망은 기교를 낳고, 그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고 했지만, 빛나는 예술은 절망에서 건져 올린 게 상당수임을 부정하긴 어렵다.

  “가장 어두운” 방은 과거의 깊은 절망이나 지금까지 부지불식간에 영향을 주는 슬픔의 원천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슬픔을 위로 받으며 삶의 새로운 동력을 얻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익숙한 어둠이 무의식 깊숙이 스미어 자신의 발걸음을 불러들일지 모르겠으나 어두운 방에 마냥 머물러서는 안 될 것 같다. 달콤하고 깊은 잠은 “돌아갈 준비가 된” 사람에게 허용되는 것이다. 어둠을 껴입고 한숨 푹 잔 뒤에는 어둠을 저만큼 밀쳐놓는 게 식물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