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거미를 보며 / 임보

톰소여와허크 2014. 7. 31. 15:50

거미를 보며 / 임보

 

방 안 내 책상 위 스탠드에

어디서 왔는지 작은 거미 한 마리 줄을 늘인다

거기 늘여 봐야 쓸데없다고

내가 입바람을 불어 밀어내지만

조금 있다 보면 다시 또 줄을 늘이고 있다

이놈아, 여기에 쳐 봐야 걸릴 게 없어

배만 곯아 다른 데로 가

그래도 내 말은 아랑곳 않고 고집을 부린다

 

그놈을 한참 들여다보다

문득 나를 본다

그놈이나 나나 걸리지 않을 그물 치기는 마찬가지

밤낮 내가 치고 있는 시(詩)의 그물에

걸릴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쓸모없는 시 그물 치며 허송세월하는 놈이나

어리석은 사냥 그물 늘이고 기다리는 거미나

그놈이 그놈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 『검은등뻐꾸기의 울음』, 시와시학, 2014.

 

 

  * 책상 위 천장 모서리에 거미 한 마리 사는 줄 우연히 알고 며칠 동거한 인연이 생각난다. 혹시 누가 그걸 보고 소란을 떨고 거미와 거미집을 거둘까 봐 조심조심하면서 몰래 거미와 마주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느 날 그 거미가 책상 위 주검으로 발견되었을 때 마음이 복잡했다. 누가 거미의 목숨을 거두었을까, 아니면 영양실조로 제풀에 쓰러진 건가, 왜 하필 내 책상 위란 말인가. 이 의문을 시(詩)로 한번 써봐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지금까지 그러지 못했다. 이야깃거리가 되고 안 되고는 둘째 문제고 본질적인 문제는 시를 품고 살지 못한 이유다.

  시인은 “밤낮”으로 “시 그물”을 치고 있다. 스스로는 엉성하다고 말하지만 그물에 걸린 자는 촘촘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물의 강도나 성긴 정도보다 그물을 친다는 그 자체가 의미 있는 일임을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시의 그물을 엮어가는 일이 시인에겐 일상을 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의도적으로 뭔가를 꾸민다는 의식도 없이 자연스레 행하는 것을 지극한 경지라고 말할 것 같으면, 거미와 자신과 시를 그물로 엮어 경계를 넘나드는 시인의 모습에서 그런 인상을 받게 된다. 또한, 지극한 경지는 삼매(三昧)에서 오기도 함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오직 하나의 대상에 정신을 집중해서 비로소 이룬 생산적인 알짜가 시(詩)일 것이기 때문이다.

  거미 한 마리, 지금도 머릿속에서 집을 틀지만 내가 치는 그물은 거미도, 다른 무엇도 포획하지 못하고 근들거리기만 한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