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여진 / 이병률

톰소여와허크 2014. 8. 8. 17:18

여진(餘震) / 이병률

 

 

다 살고 치우고 나서야 알게 된다

찬장 뒤쪽으로 훤히 나 있는 뒷문을,

그 문 뒤로는 한여름에도 눈이 펄펄 날린다는 비밀을

 

한참을 열어놓고서야 알게 된다

처음의 처음까지 다 이해할 수 있음을

여진이 끝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그러고도 가끔은 자고 있는 중에 문이 열린다

열린 문이 열린다

 

봄날은 갈 것이다

그 사실을 보내는 동안 여름날도 갈 것이다

양손으로 상자를 받았는데 상자를 내려놓지 못하고

상자를 열게 되더라도

무엇이 뼈고 무엇이 옷이며 지도인지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죽은 다음에야 다 볼 수 있으리

 

뒤늦게 더듬어서라도 다 볼 수 있다면

아무것 없이도 아름다우리라고

대륙의 끝으로 자신을 끌고 가

한없이 데리고 울다 지친 이

 

그가 들썩일 때마다 뒷문이 울린다

조금은 알게 될 것이라고

그가 끄덕일 때마다 뒷문이 따라 열린다

비릿한 뒷일들도 문지방을 넘게 될 것이라고

 

갈라진 마음 끝에 빛이 들듯

그렇게 가을날도 갈 것이다

- 『눈사람 여관』, 문학과지성사, 2013.

 

 

  * 살아서는 잘 보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평화를 갈구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많고, 사랑을 원하지만 미울 때가 있다. 그런 불화와 갈등을 지나오는 게 삶이라고 말들 하겠지만 그 과정에 주고받은 상처도 적지 않을 것이다.

   찬장을 치우고서야 뒷문을 본 것처럼 시인은 다 지난 뒤에야(여진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보이고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단다. 그 열린 문이 생의 비밀스런 진경을 보여줄 수 있음은 맹목의 감정이 조금씩 누그러지거나 객관화된 이후의 일일 것이다.

   시인은 상징으로 가득 찬 상자 하나를 들고 있다. 뚜껑을 열었는지 아니면 짐작만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이제 상자는 독자의 손에도 쥐어졌다. 상자 속에 꺼내고 싶은 게 뭔지 그게 있기라도 할지 이리저리 궁리하는 사이에 봄날은 여름날은 슬그머니 새고 있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