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가루비 내리는 한가위 / 김금용
떡가루비 내리는 한가위 / 김금용
가는 비 내리는 한가위 전날,
중국인 조선족 아낙네들
흑룡강 햅쌀로 송편을 빚는다
평상 한편에서 곰방대 피우시던 조선족 시아버지
넌지시 말씀 하나 보태신다
보름달 못 본다고 서러워 마라, 이 비는 떡비야, 떡비
봄에는 일하라고 내리는 일비
여름에는 잠시 쉬어 낮잠 자라고 내리는 잠비
겨울에는 농한기이니 술 마시라고 술비가 내려서
지아비와 제때 눈 한 번 마주치기가 어렵지만
한가위에 내리는 이 비는
가을걷이 뒤, 떡 해먹고 일찍 자라고 내리는 비거든
그 덕에 자식 만들기 좋은 꿀비지,
농사짓기 딱 좋은 단비가 내릴 때
농군들은 목 빼고 기다리지, 모내기 때 내리는 못비를
때론 심술 맞은 여우비, 바람비, 도둑비에
마른비, 잔비, 실비, 싸락비, 날비, 발비, 작달비, 달구비,
거기에 건들장마, 우레비까지 시비를 걸어오지만
뭐니 뭐니 해도 떡비 때문에 또 한 해 넘어가지
그렇지, 고루고루 떡시루 가루가 내려오니까 말야
시아버지의 곰방대를 빠져나온 담배 연기가
가루비에 섞여 동글게 송편을 빚는다
송편 솔향이 이웃 중국집들 사이를 빠져나간다
지아비 지어미 모두 한국으로 가 버린
조선족 아이도 솔향 따라 굴뚝 너머를 울려다본다
부모 얼굴 섞여 내리는 가루비를
- 『핏줄은 따스하다, 아프다』, 문학세계사, 2014.
* 중국인은 추석에 월병(月餠)을 나누어 먹는 풍속이 있다지만, 중국 안의 소수민족인 조선족은 우리말을 간직한 것처럼 조선의 풍속을 잊지 않고 해마다 송편을 빚는다. 그 송편 빚는 아낙에게 들려주는 시아버지의 말은 그 자체로 시적이다.
보름달을 못 봐서, 그래서 소원 빌 기회를 놓쳐서 시무룩해진 그네들을 위해 떡비 같은 말씀을 내려놓는다. 떡비는 풍년 들어 떡을 해 먹을 수 있게 하는 비라는 뜻으로, 요긴한 때에 내리는 비를 일컫는 말이다. ‘떡’이 주는 넉넉함과 ‘비’가 주는 시원함에다 부부의 정까지 떠올리게 됨으로써 그야말로 무국적(無國籍)이고 도발적이고 생산적인 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시아버지의 말씀으로 고무된 분위기는 혼자된 조선족 아이의 얼굴로 클로징되면서 다소 서늘해지는 느낌이다. 생계를 위해 국경을 건넜던 사람들이 또 다시 생계 문제로 한국 곳곳에 체류하면서 이산가족이 양산되는 조선족 현실을 환기시키며, 시인은 짐짓 말을 아낀다.
세상 어디든 “고루고루” 내리는 선물! 그건 희망 사항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랬으면 하는 바람들이 모이고 모여서 가난한 지상으로 떡가루비 오실 거라 믿는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