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냉면 / 신동호
평양냉면 / 신동호
열두 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요선동 평양냉면을 첨 먹어봤다. 친구가 없던 아버지는 복더위에 삼계탕이나 개고기를 드실 때 꼭 날 데려갔다. 냉면 맛은 참 밍밍했다. 아버지 인생이 그랬다. 전쟁 통에 청각이 포격 소리와 함께 진흙탕에 묻혔다. 낚시찌처럼 강물 위에서 말없이 흔들리는 게 인생이었다.
사랑이랍시고 절망에 몸부림치거나 시대에 모든 걸 바친다고 유치장과 감옥을 들락거렸으니, 꽤나 드라마틱한 삶 같지만 결국은 고만고만한 게 인생이다. 분노도 삭고 열등감 따위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았을 때 냉면집 문턱이 닳도록 다니게 되었다. 양념 하나 없는 투명한 육수가 오래된 친구들 같아서 낮술에 자주 쓰러지던 시절, 전투력 없이도 툭툭 끊어지는 면발 앞에서 자주 무너지던 나이였다. 참으로 밍밍한 게, 뭐가 잘난지도 모르게 된 내 맘 같았다.
서른 일곱 살 때, 첨 대동강변에서 평양냉면을 먹어봤다. 유산 한 푼 없이 낚싯대 몇 개 남기고 간 아버지의 인생, 가끔이었지만 그 원망스러운 날들이 밍밍하게 희석되는 경험을 하고 말았다. 인생과 인생이 만나서 얼마나 더 질기게 한을 남겨놓겠는가. 고명들처럼 소박하게 어울리는 게 인생이다. 우리만 한 마음이 수두룩한 평양이었다.
-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실천문학사, 2014.
* 냉면하면 함흥냉면과 평양냉면을 윗길로 친다. 함흥냉면은 고구마나 감자에서 얻은 녹말가루를 주원료로 하고, 평양냉면은 메밀을 이용한다. 메밀이 많이 들어가면 근기가 떨어져 면발이 “툭툭 끊어지는”일이 잦다. 평양냉면은 맵거나 짜지 않고 시원한 맛이 있다고 하는데 시인은 이를 밍밍하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인생도 자신의 인생도 그러하다고 말한다.
“친구가 없”고, “낚시찌처럼 강물 위에서 말없이 흔들리던”아버지는 전쟁에서 청각을 잃은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낚시로 다스리지 못한 한(恨)이나 울(鬱)은 일정 부분 가족에게 넘어오기도 하면서 아버지의 한이 자식의 그늘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시인은 사람에 대한 사랑과 실패, 세상에 대한 사랑과 분노로 들끓었을 시절을 지나오며 자신의 삶도 결국 밍밍한 마음자리에 있음을 생각하고 아버지의 인생을 좀 더 깊이 이해하는 시간을 갖는다.
입맛 따라 좋고 나쁨을 가리기도 해야겠지만, 길게 보면 밍밍한 게 제맛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맛 저 맛보다는 “고명들처럼 소박하게 어울리는 게”맛을 돋우는 기본이다. 북과 남이, 보수와 진보가, 아버지와 아들이 그렇게 어울리면 딱 좋을 것이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