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닭 / 최광임
산닭 / 최광임
조류든 포유류든 계보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영예와 상징의 시대를 지나 뻐꾸기에게 몰수당한 울음
새벽 모가지를 비틀지 않아도 홰칠 밤은 사라진 지
오래다, 사실은 너무 높이 날기를 꿈꾸던 조상
옥황상제님 발바닥 아래까지 긁어댄 내력의 대역죄로
무기수형 중에 있는 것인지도 몰라
피아골에서 나는 산닭숯불구이를 먹던 날에도
나는 것과 날지 못하는 것들 사이
통통한 씨암탉과 백 미터는 거뜬히 난다는 산닭 사이
에 대하여 생각했던 것인데
최 시인 좋아진 걸 보니 시인이기를 포기한 거로구만
안분지족 씨암탉이 되어갔던 것인데
딱 꿩만 하다는 산닭, 밤에나 잡아야 한다는 그 닭들
갈매기보다 더 멀리 날았다는 족보도 없는 조상의 꿈
그 전생의 힘으로 푸드득푸드득 겨울 산을 뒤틀며
산꿩처럼 날아가 여영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는 산닭들
그날로부터 그들에게는 다시금 써야 할 역사가 생겼기 때문일 것인데
벽장 유리문 박차고 뛰쳐나온 뻐꾸기 울음에
산산조각 베이도록 울었든가 어쨌든가
- 『도요새 요리』, 북인, 2013.
* 산닭이라는 꿩과의 새가 따로 있기도 하고, 평안도 지방에서는 꿩을 산닭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시인이 말하는 산닭은 집닭의 상대되는 말에 가까워 보인다. 산닭도 어쩔 수 없이 인간에 의해 길러지되, “나는 것”으로서의 야성을 잃지 않고 있다. 여차하면 “푸드득푸드득 겨울 산을 뒤틀며/ 산꿩처럼 날아”서 인간을 아래로 볼 테니 산닭 쫓던 인간, 날개 먼지만 마시는 꼴이라 하겠다.
먹이만 구하는 닭은 힘들게 날 필요가 없다. 점점 날개의 힘도 잃어 갈 것이다. 자유를 포기한 대가는 잔인하지만 정작 집닭은 그걸 알기나 할까. 자유에 대한 의지 없이 비상할 수 없고, 비상하지 않으면 세상을 알 수 없다. 시인은 산닭으로 살고 싶은 게다. 가벼운 농담 속에서도 자신이 현실에 안주하려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성찰할 줄 안다.
성찰할 줄 모르는 자유가 남의 자유를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로운 정신이 새로운 삶을 창조한다고 믿는다. 더러 가짜가 진짜처럼 울음을 내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산닭의 자유를, 살아있는 정신을 기리며 부지런히 날갯짓을 해야 할 줄 안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