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미음 끓는 저녁 / 손세실리아

톰소여와허크 2014. 11. 7. 09:13

미음 끓는 저녁 / 손세실리아

 

 

까막눈으로 살아온 팔순 노모

복지관 한글반에 입학하던 날

숙제로 내준 자음 쓰고 또 씁니다

교본 베끼는 일도 괴발개발이지만

소리 내어 읽기는 가르쳐주고 돌아서기 무섭게

헷갈려 합니다 특히 ㅁ은 그 정도가 심해

우물쭈물하다 끝내 말문을 봉해버립니다

단번에 각인시킬 묘안을 짜내지 않으면

때려치울 것 같아 궁리 끝에

 

김감심

 

피란 통 보릿고개를 배곯지 않고 넘겼다더니

이제 보니 그거 다 엄마 이름 덕이네 뭐

미음이 한 그릇도 아니고

세 그릇씩이나 든 이름을 가졌으니

그럴 수밖에

이름 풀이 채 끝나기도 전

득의만면 앉은뱅이책상 끌어당기더니

열 칸 공책 한가득

ㅁ, 쓰고

미음, 쑤느라

잠도 잊은 채 골똘한

 

- 『꿈결에 시를 베다』, 실천문학, 2014.

 

 


  * 한글 미음()과 먹는 미음(米飮)이라는 동음이의어를 적절하게 활용한 한 편의 미음(美音) 같은 시를 읽는다. 한글 자모 익히기를 둘러싼 모녀의 신경전 끝에 극적인 성공(?)을 이끈 발상 하나가 이 시의 모티브라면, 그 발상에다 모녀의 정을 입힌 것은 시인의 마음결일 것이다.

김감심. 실제, 시인의 어머니 이름이다. 감동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이 다 감심인데 모녀의 대화와 행동이 꼭 그런 마음의 표현으로 보인다.

성과 이름마다 미음을 달고 있는 건 건사해야 할 입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폭폭 했을 그녀의 노고를 인정하고 위로하는 마음이 오늘의 그녀를 더 씩씩하게 더 자랑스럽게 만드는 일일 텐데 여유 없이 살면서, 가까운 사이란 게 오히려 핑계가 되어 인사를 잊을 때가 많다.

사람살이 제각각이지만 세상에 온 그날부터 평생 갚지 못할, 빚진 인생은 매한가지다. 깨달음이 더딘 나 같은 사람을 위하여 어버이께 감심가지라고 분발심을 주는 입술소리 따갑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