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한 잔의 가을 / 김은경

톰소여와허크 2014. 11. 21. 00:07

한 잔의 가을 / 김은경

 

 

싸움이 격렬하다

수만 번의 실패 끝에

바닥을 치고 다시 솟아오르는 빗방울들

 

방 한 칸 없이 지상에 와

뼛속까지 가볍다

 

정이 깊어 이별도 숱한

술잔 속 가을

 

기울어진 모퉁이에 앉아

빗물을 잔으로 받아내며

국수 가락을 건져 올리는 손들은

어째서 죄다 풀빛일까

 

빗방울은 술잔에 담기 알맞은 몸이지

스스로 깨지길 감당하면서

통통거리면서 풀썩 주저앉으면서

비틀대다 고꾸라지면서

 

다시 떡 일어나는 주정뱅이들

지겨운 저 눈물 화상들

- 『불량 젤리』, 삶창, 2013.

 

 

  * 가을비 유난한 날, 모퉁이 국숫집에 앉는다. 치장 없이도 요란한 빗소리만큼 국숫집에 앉은 사람들도 후줄근한 매무새에도 술기운 빌려 떠들어대고 싶은 이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방 한 칸 없이 지상에 와” 있기는 창밖의 빗방울 하나하나와 국숫집의 면면들이 다르지 않을 것이고, “스스로 깨지길 감당하면서” “비틀대다 고꾸라지”는 것도 퍽이나 닮았겠다. “바닥을 치고 다시 솟아오르는” 습성까지 혹은 그런 바람까지 똑같다고 하겠지만 그 바닥으로부터 얼마 뜨지 못할 것이며 곧 바닥에 스밀 것이라는 가정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바닥이 바닥에게 내미는 정이 제법 흥건할 테니 미리 낙담하지 말자. 돈에 울고 사랑에 실패한 “눈물 화상들”끼리 국수를 나누며 가을 한 잔 맛나게 꺾을 테니.(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