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 대관령 / 허림
유월 대관령 / 허림
바닷가 마을에 봄꽃이 다 지고 난 무렵 대관령에 갔다 이제야 노란 향기 품은 꽃들과 발가스름한 까마구 복사꽃이 폈다 밭두렁에서 봄을 캐는 아낙들이 나물처럼 환하다
오래 전에 대관령 어딘가 산다는 산막의 여자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봄이 다 지나갔다고 쓴 것 같은데 다 지나간 봄을 만나러 오지 않겠냐는 답장이 왔다
몇 번의 봄이 바닷가를 지나간 후 문득 보고 싶은 봄꽃을 보려고 대관령을 갔다가 어떤 꽃향기에 끌려 산막을 지나게 되었다 안개가 밀려오고 이내 바람이 불었고 어떤 꽃향기도 이내 흐릿해지고 서늘했다
긴 밭고랑 끝에서 그 여자 닮은 여자가 이쪽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내 안개에 묻히고 밋밋한 등강에서 한 떼의 소들이 울며 내려왔다
유월 대관령 지날 때마다 봄을 만나러 오라는 한 여자가 산다고 여태 기억하곤 한다
- 『말 주머니』, 북인, 2014.
* 눈과 바람의 고장으로 알려진 대관령의 봄은 어떤 모습일까. 자생하는 봄꽃을 쭉 읊지는 못하겠지만 남쪽 지방이나 바닷가 지역보다 봄이 한창 더디게 오는 줄은 알겠다. 그러니 초여름 유월에 “다 지나간 봄을 만나러 오지 않겠냐”는 산막 야자의 답장은 이상할 게 없다. 그럼에도 묘한 설렘과 야릇한 끌림은 뭔가.
시인은 봄바람 이는 시절의 수상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을 생각이 없나 보다. 산막 여자를 만났는지, 함께 봄꽃을 보았는지, 어떤 약속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그 시절로부터 많이 떠나와 있음을 느끼게 한다.
대관령의 이미지 때문인지, 모호한 연애 감정 때문인지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이 겹쳐 생각난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은 열정적일 수는 있어도 집착과 복수로 인해 일그러진 모습인 반면에, 시인이 보여준 사랑 이야기는 대관령 안개와 같이 비밀스럽고 아스라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물론, 이것도 시간이 추억을 멋대로 주무른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강요와 집착과 미련으로 얼룩지거나 파국에 이르는 사랑보다는 훨씬 인간적인 사랑법으로 와 닿는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