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항해 / 송유미

톰소여와허크 2015. 6. 20. 16:30

항해 / 송유미

 

- <강아지 나라> 두 여자가 낑낑거리며 강아지에게 운동화를 신긴다.

지하도에서 만원 세일의 신발을 구경한다.

 

어릴 적 교회당에서 잃어버린 신발은 늘 섬처럼 내 인생을 떠다녔어요. 난 늘 신발을 아끼느라 맨발이었지요. 잠들 때도 가슴에 품고 잠들었지요. 신지 않고 다락방에 모셔두었다가 내 커버린 발을 집어넣을 수 없었지요. 그 신발을 품고 꿈속을 걸어갔지요. 낙타는 내 신발을 부러워했죠. 난 신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죠. 폴리호 태풍이 불던 날이던가요. 자꾸 진흙탕 속에서 미끄러지는 신발 때문에 내 몸이 블랙홀에 빠져들어갔지요. 신발이 없는 삶이 얼마나 편안한지 그때 알게 되었죠. 나는 그래도 잠이 들면 신발 속으로 들어가서 꿈을 꾸죠. 엄마의 자궁같이 따뜻하고 비릿한 어둠 속에서 눈을 감으면 난 꽃으로 피죠. 나비가 날아오르죠. 모두 모두 나비가 되어 하늘로 떠나고 댓돌 위에 검정고무신들만 남았어요. 이제껏 내가 신은 신발은 몇 척이나 될까요. 종로 앞에서 세종로 앞에서 충무로 앞에서 자꾸만 잃어버린 신발을 신어 봐요. 흩어지는 나뭇잎들은 또 얼마나 많은 바람들이 신다가 버렸는지 셀 수도 없고요.

 

몸의 감옥을 떠다니는 나뭇잎 한 척.

 

- 『검은 옥수수밭의 동화』, 애지, 2014.

 

 

* 유아에겐 옷이든 신발이든 자기 몸에 뭔가를 입히거나 신기는 게 여간한 일이 아니다. 이 기간을 얼마간 지나야 스스로 입고 신게 된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자유스러움을 잃는 대신 스스로 구속을 껴입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시인은 애지중지하던 신발을 잃고서야 “신발이 없는 삶”의 편안함과 자유에 생각이 미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시인은 이제 와 신발을 버릴 수 없음을 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보다 적당히 가릴 줄 아는 염치를 차리면서부터, 신발을 신고 안 신고가 아니라 어떤 신발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 척의 배가 인생의 파고를 헤쳐 나가듯 아침이면 저마다의 신발에 몸을 싣고 밖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때로 랭보의 바람구두가 되어 어디든 다니는 자유를 꿈꾸기도 하겠지만 대개의 경우 출발한 그 자리에 닻을 내릴 것이다.

이처럼 신발을 아주 벗기 전에는 누구든 “몸의 감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신발에 엔진을 걸거나 날개를 다는 상상력이 있기에 감옥 밖에 서 보기도 하는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