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 정우영
장욱진 作, ‘툇마루’(1974)
혜화동 / 정우영
우글우글 쏟아지는 기억을 비집고 스무 살 민영 선생이 장욱진 선생을 따라 동양서림에 들어간다. 서가에서 시집 한 권 꺼내 읽는데, 뒤에서 들여다본 장 선생이 “재미있나? 가져 가” 하신다. 괜스레 민망해진 민 선생은 얼른 서가에 책 도로 꽂아두는 것인데, 아하 참, 내가 더 서운하다. 동양서림 나오자 장 선생은, “저기 언덕배기 가까운 곳에 내 화실 있으니 한번 놀러 와! 하시고, 일흔다섯 민 선생 눈가에는 사라져버린 언덕 위 스무 살 그늘이 촉촉하다. 민 선생 말씀 듣다 보니 민 선생이 장 선생 같고 내가 꼭 민 선생 같은데, 내가 혜화동에서 누구를 만났더라. 기억 가물가물하고 어느덧 내 나이도 쉰을 넘어가는 참이어서 내가 장 선생의 눈빛으로 약관의 민 선생을 만난 것도 같이 시간의 셈이 아주 흐릿해졌다.
- 『살구꽃 그림자』, (주)실천문학, 2010.
* 혜화동로터리엔 간판 한쪽에 SINCE 1953이 찍힌 ‘동양서림’이 건재하다. 얼마간의 월급을 거의 술값으로 날리는 화가 장욱진을 대신하여 그의 아내가 호구지책으로 운영한 곳이다. 여기에 동료 화가뿐만 아니라 김수영 윤강로 등도 번질나게 다녔다니 적잖은 이야깃거리가 책만큼 빼곡 차 있을 것이다.
시인에게도 혜화동이 낯선 장소는 아니었을 것인데, 민영 시인을 만나고 있는 곳도 혜화동이지 않을까 싶다. 스무 살의 민영이 서른 후반의 장욱진을 만난 곳도 여기란다. 가난한 문청의 형편을 헤아려 시집을 거저 건네려는 장욱진과,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을 그 나이의 자존심으로 시집을 받을 수 없었던 민영, 이 두 사람의 옛 인연 한 장면이 영사막으로 흐른다. 일흔 다섯의 민영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쉰의 시인이 받아 적은 내용이지만, 이제 거꾸로 시인 자신이 옛날의 민영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민영을 바라보는 장욱진의 눈빛과 자신의 것을 겹치기도 하면서 “시간의 셈”이 흐려졌다고도 했다.
선후도 우열도 없이 시공을 넘나드는 이것을 우정이라 말해도 되겠지만, 사람도 우정도 흐르긴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내주고, 술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특유의 눈빛까지 남기는 일은 내 인생의 혜화동을 쓰는 인상적인 무엇이 아닐 수 없다. 그 인상으로 시를 쓰고 읽고, 그림을 그리고 읽는 모든 일들이 다 다정이 흐르는 시간이라고 적어 둔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