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돈화문로11나길 / 문정영

톰소여와허크 2015. 7. 14. 17:38

 

돈화문로11나길 / 문정영

 

 

종로3가에는 할머니 칼국수집 김 서린 유리창 같은 골목이 있다.

그 유리창에 봄이라 쓰면 골목 끝에서 능소화가 핀다.

수선집 박음질 소리에 처마들이 단단해진다.

낮은 창문의 하루를 안다면 새들의 저녁을 아는 일이다.

몇 벌의 나비를 걸어 놓은 한복집에서는 풀향이 흘러나오고

봄꽃들이 옛날 무늬처럼 피어난다.

 

골목이 생긴 이후 새로모신점집보다 바람이 그날의 점괘를 본다.

오르막 내리막이 없는 평운(平運)이다.

우산 하나로도 눈비를 막을 수 있는 골목에서 헤어진 연인은 다시 그 길로 들어서면 하나가 된다.

돌아서거나 비켜 갈 수 없어 길의 끝까지 가야 한다.

능소화주차장은 능소화가 져도 능소화주차장이다.

 

돈독(敦篤), 돈화(敦化) 도탑다는 의미가 구불구불 돌아나오는 골목에서 지난겨울 가랑눈도 어떤 깊이를 가졌겠다.

누군가 불러 눈을 감으면 속눈썹 끝에 흰 발자국이 걸렸겠다.

 

- 『그만큼』, 시산맥사, 2014.

 

 

* 지도에서 찾은 ‘돈화문로11나길’은 종묘 맞은편의 길로서 탑골공원과 운현궁에 못 미처 그 사이를 잇는 길이니 일신하는 서울의 풍모 중에 옛것을 제법 간직하고 있는 길이다. 번듯하게 포장된 길과 고층의 빌딩 숲, 대규모 쇼핑몰과 학원 건물로 구색을 갖춘 곳에서 최적의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인식이 여전하지만, 옛이야기를 간직한 오래된 골목의 가치가 조금씩 조명되면서, 새로운 답사지로 인기를 모으는 골목도 생겨나고 있다.

시인의 말로 듣는 ‘돈화문로11나길’은 수선집 박음질소리와 한복집 풀향이 남아 있는 곳이다. 한복 옷감이나 무늬에서 골목으로, 그 골목에서 골목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로 “봄꽃들이 옛날 무늬처럼 피어나”고 번져가는 정감 어린 길이다. 그 길의 끝에 능소화도 있고 옛 애인의 자취도 있다.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에서 성장한 사람은 탄탄대로를 걷는 사람보다 도탑고 깊을 것이다. 골목을 벗어나도 골목을 사랑할 줄 안다. “김 서린 유리창”처럼 흐린 데다, “속눈썹 끝에 흰 발자국”처럼 그립기도 하고 아득하기도 한 골목이 있어 줘서 다행이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