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날 / 김수상
맑은 날 / 김수상
날이 흐리다가 맑아서
오래된 베개를 빨기로 하였다
혼자 벤 베개임이 분명한데
베갯속이 얼룩덜룩하였다
나도 모르는 내가 여기에
울고 간 적이 있었나보다 아직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울음들이
빼곡하였다
오이 냄새가 났다
- 『사랑의 뼈들』, 삶창, 2015.
시인의 베개 타령을 들으니 “첫날에 길동무 만나기 쉬운가 / 가다가 만나서 길동무 되지요”로 시작해서 “嶺南의 晉州는 자라난 내 故鄕/ 돌아갈 故鄕은 우리 님의 팔베개”(<팔베개 노래 調>에서)로 끝나는 소월의 노래가 문득 생각난다. 기녀의 노래를 받아 적은 것이라고 시작 배경을 밝히기도 했지만 쓸쓸한 여인이 많았던 소월의 가계나 그 쓸쓸함을 운명적으로 따랐을 소월의 처지도 반영되어 있을 줄 안다.
시인은 “혼자 벤 배개”(팔베개할 대상이 없었을까)의 베갯속이 얼룩덜룩한 것을 두고, 나도 모르는 내가 울고 간 흔적으로 읽는다. 체면이든 자존이든 뭐든 간에 남 앞에서 울지 못하다가 잠자리에서야 스르르 풀어지는,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베개가 받아 적었다는 것 아닌가. 시인은 여기에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울음”을 더하여 울음의 파장을 넓혀 간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베개에 배인 눈물의 흔적은 존재론적 외로움일 수도 있고 사람 사이 관계에서 오는 슬픔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지향성을 내재한, 그렇게 함으로써 탐구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시의 원천이기도 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쓸쓸한 자아의 모습이 연상되지만 “오이 냄새”로 환기되는 시의 맛은 상큼하기도 하고 물큰하기도 하며, 맑기도 하고 성적(性的)이기도 하다. 눈물의 의미를 하나로 못 박을 수 없는 이유다. 혼자 벤 베개의 눈물 흔적을 마음에 걸려하는 사람을 위하여 누군가의 팔베개를 권하고 싶지만 혼자 하는 팔베개도 충분히 달콤새큼하다고 말할 위인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