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싸움의 끝 / 황규관

톰소여와허크 2015. 8. 10. 13:50

 

 

싸움의 끝 / 황규관

 

 

내게 싸움 중의 싸움이라면

하굣길 동네 여자애들 괴롭힌다고, 아랫마을 형에게

겁 없이 대든 일이다

구석에 몰려 되게 맞았고, 나는 그를

한 대도 때리지 못한 채 코피를 흘리며

동네 뒷산을 혼자 넘어와서

강줄기를 바라봤었다

지금도 싸움을 멈추지 못하고 있지만, 사실은

사소한 싸움 하나 제대로 못하는 게 맞다

모든 일에 이해관계가 생기고

힘의 우열을 남몰래 재보게 되고

하물며 아내하고 싸울 때도

작은 방에 처박혀 책을 읽는 척하는

새끼들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이래서는 어떤 싸움도 더러워진다

전리품을 얻기 위해 싸우고

자리를 바꿔 앉기 위해 싸우고

싸움 이후를 먼저 생각하며 싸우는 일은

그래서 역겨운 것이다

기쁨도 설움도 내 것으로 하는 싸움을 해야 하는데

그러면 정말 싸움을 끝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제는 싸움 자체가 두려워졌다 싸움 이후에

열세 살 적 강물이 보이지 않는다

 

-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주)실천문학, 2011.

 

 

 

  * 아랫마을 형에게 대들었다가 일방적으로 맞았다는 열세 살 아이는 강줄기를 보며 꽤나 비장했을 것이다. 정의를 편들어주지 않는 세상을 곱씹기도 하고, 정의감을 따라주지 않는 약한 주먹에 실망하기도 하며 자존에 상처도 입었겠지만 그 내상은 깊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싸움 걸 일에 자신을 던졌다는 자랑도 있겠다 싶다. 이해관계나 힘의 우열을 재보지 않고(어쩌면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고 착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순전히 옳고 그른 것만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이는 열세 살 이후의 시인이 고민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시인은 살아가면서 작게는 개인사로 인해 싸우고, 크게는 민주와 노동이 이슈였던 시절을 지나오며 전의를 태우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싸움의 진정성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새끼들을 생각하는 마음, 전리품이나 자리에 연연하는 마음 즉, "싸움 이후를 먼저 생각하며 싸우는 일"들이 싸움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자신의 싸움으로 생각하고 전력을 다해야 할 시점에 따로 살 방도를 챙기거나 미적거리는 태도로 인해 "싸움의 끝"이 보이지 않거나 미뤄지고, 아예 싸움의 동력마저 잃어가는 형편을 읽은 것이다.

  시인은 "이제는 싸움 자체가 두려워졌다"고 하면서 앞으로의 싸움은 그 두려움과도 싸워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그 두려움은 힘이 있는 자가 심어준 것일 수도 있고 그 힘을 추종하는 내부의 또 다른 목소리가 그걸 키우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매일매일 살아가는 생활 자체가 두려움의 연속일 것이다. 외부의 적과 싸우고, 내부의 두려움과 싸우는 이중의 싸움을 어떤 식으로든 해나가야 하겠기에 "살아가는 인생 그 자체가 싸움인 거야"(영화 '싸움의 기술'에서)라는 대사도 자연스레 겹쳐진다.

  싸우지 않고 다 같이 잘 지내는 게 이상이라면, 싸워서 세상을 조금씩 좋은 쪽으로 바꾸는 것이 차선은 될 줄 안다. 내 안의 싸움꾼이 너무 기죽어 있지 않나, 강줄기 하나 흔들어 봐도 천만 좋을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