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국수를 받는 저녁 / 이중기

톰소여와허크 2015. 9. 22. 21:34

 

 

국수를 받는 저녁 / 이중기

 

나 이제 오래 옛날처럼 어두워지리라

고봉밥 한 그릇 다 비워도 허기지던 시절로 왔다

그 어떤 오라로도 묶을 수 없는 허기를 청해 모신다

종횡무진의 가난한 필력, 국수 한 그릇 받는다

포악한 걸신 앞에 세상 모든 오라를 불렀다

국숫발 오라를 받는 걸신 표정이 달의 뒤편 같다

달빛을 헐뜯는 먼 개 울음소리 듣는 마을의 농막

아버지를 못 살게 굴던 나라의 가난이 여기 와 있다

 

- 『오래된 책』, 신생, 2008.

 

 

* 신(神) 중에 신의 계보에 끼지도 못하고 빌어먹는 신이 걸신(乞神)이다. 지나치게 음식을 탐하는 것을 걸신들렸다 혹은 걸신스럽다고 하니, 듣기에 퍽 좋은 말도 아니다. “가난한 필력”의 대가로 국수를 받는 그 시간에 문득, 시인은 걸신을 마주한다. 음식을 걸신들린 듯 해치우는 사람들 속에 저 자신도 있으리라. 국숫발 올올이 오라가 되어 자신의 삶을 친친 감고 있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다. 대대로 이어지는 가난이다.

  이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데모를 하고 뭐든 애를 썼겠지만 결국, 한 끼 먹는 데 급급한 걸신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그 걸신의 민낯을 드러내기보다 “달의 뒤편”으로 슬쩍 치환하면서 상상의 묘미를 더한 것도 재미난 요소다. 달의 뒤편은 구리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하고, 캄캄하기도 할 것이다. 반대로 가 닿고 싶은 뭔가도 있겠다 싶다. 기꺼이 “옛날처럼 어두워지리라”라는 시인의 말이 그렇다. 지나치게 먹어서 배부르기보다는 가난 안에서 평등한 얼굴로 지내고 싶은 거다.

  걸신은 대접해야 한다. 오라 같은 국숫발을 이웃과 나눌 것 같으면 걸신도 느긋해져 씩 웃지 않겠나.(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