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 / 정하해
균열 / 정하해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눈썹에 앉혀도 될 작은 역사가 철로를 연주하는 저 공손한 대접
아! 나를 접고 들어야겠다
이 음악으로 하여
지금 앓는 병을 고치는 실수, 하지 않으리라
만지면 솔가지 냄새를 풍기는 승부역
철로가 내는 저 대금 소리 사람의 바탕이 순해지는 처방전이다
골짜기 하나의 음색이 서로 다르게
울어대는
우리는 어질러지고 있는 것이다
나를 기울여 잔을 친다
아니, 문명을 꺼버린다
하늘은 숭숭 대낮에도 쏟아지는 검은 눈발들
딱히 그렇게만 보이는 깨진 간 덩어리
그것을 경험하러 저녁에 내리는 사람들
- 『젖은 잎들을 내다버리는 시간』,시인동네, 2015.
* 영암선(지금은 영동선에 편입)은 영주에서 시작하여 철암에 이르는 구간이다. 분천역과 승부역을 잇는 구간은 험악한 산악 지형으로 인해 공사가 난망했던 곳으로, 그 고생을 기려서인지 영암선 개통 기념비가 승부역에 있다. 오지 중의 오지로 인적도 끊기고 기찻길도 끊어질 위기에서 백두대간 협곡열차가 히트를 치면서 부지런히 사람을 부려놓는 요즘이다.
승부역엔 최소한의 문명인 양“눈썹에 앉혀도 될 작은 역사”가 있고 어디든“만지면 솔가지 냄새를 풍기는”자연의 체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특별히 가꾸지 않았기에 더 사랑받는 장소인데, 찻길을 넓히고 편의시설을 갖추려는 수고를 부디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계속 부하게 하라는 승부(承富)의 운이 감도는 동네. 승부역을 찾은 시인은 승부(勝負)를 가리는 세속의 운과 그곳에서 묻혀온 피로를 내려놓고 심호흡으로 몸과 마음의 문을 여는 중일 테다. 철로가 피아노 건반이 되고, 골짜기가 소리통이 되는 시청각에 시골의 향과 바람의 촉감까지 더하여 오감이 활짝 열렸을 테니 이만한 열락이 없다. 여기선 자신을 고집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경계를 풀어“나를 접고”, “어질러지고 있는” 그 자체로 자유가 된다.
내리는 눈발을 “깨진 간 덩어리”로 비유한 생경함도 두텁게 더께가 진 자신의 껍질이 부서지는 모습으로 이해된다. 반가운 균열이다. 승부역에 가면 자신을 열어야 한다. 아니 승부역이 그렇게 만들어 주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금간 간이 부스러기 떨어뜨리고 더 참해지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