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너는 아느냐 / 채형복

톰소여와허크 2015. 12. 7. 14:53

 

너는 아느냐 / 채형복

 

유학 시절

수업 중 쉬는 시간

나보다 열 살은 어린 친구에게 푸념했다.

프랑스인들은 왜 한국에 대해 무지하냐고

88올림픽을 치른 나라요

세계 10대 경제 대국인데

사뭇 비장한 어조로 물었다.

심각한 얼굴로 듣고 있던 어린 친구가 되물었다.

너는 아프리카의 약소국들에 대해 아느냐

그들이 흘리는 피와 눈물의 의미를 아느냐

제 형과 같은 내게 되물었다.

당시 소말리아에서는 내전이 있었다.

수십 수백만의 실향민들이 난민으로 떠돌고 있었고

살인과 강간, 방화로 연약한 노인과 여인, 그리고 아이들이 죽어갔다.

자신과 한국이란 조국에만 집착한 나는

부끄럽게도 소말리아에서 일어난 일에는 무지하였다

나는 평화로운 국제질서를 꿈꾸는 국제법학도였고,

분열과 갈등을 넘어선 통합을 이룩한 유럽공동체법을 공부하는 통합론자였다.

자성과 체험을 거치지 않고

관념에만 사로잡힌 지식의 무력감.

관념에 사로잡힌 지식과 지식인은 위험하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어린 친구가 나를 준엄하게 질책하는 꿈을 꾸곤 한다.

너는 아프리카의 약소국들에 대해 아느냐

그들이 흘리는 피와 눈물의 의미를 아느냐

어린 친구의 질책은

여전히 무섭다.

 

- 『우리는 늘 혼자다』, 높이깊이, 2012.

 

 

* 시인은 프랑스에서 법 공부를 하던 시절의 삽화 한 장면을 떠올린다. 제법 먹고살게 된 조국 코리아를 알아주지 못하는 서운함을 이야기하려고 했다가 거꾸로 입이 무색해진 것이다. 내전과 그로 인한 난민 생활로 신음하는 아프리카 약소국을 두고 코리아를 먼저 생각할 이유가 뭐냐는 답변으로 받아들였다면 재치 있는 말로, 혹은 질문 의도를 비켜 가는 후배의 버릇없는 말로 여길 수도 있지만 시인은 그렇지 않았다. 배움은 배울 마음의 자세를 갖고 있을 때만이 자주, 크게 일어나는 것임을 알겠다.

나 역시 소말리아 난민의 과거와 현재가 어떤지 잘 알지 못한다. 몇몇 보도와 사진(케빈 카터의 수단 소녀와 독수리 사진, 잭 켈리의 소말리아 두 형제 사진은 잔상이 오래 남아 있다.)으로 난민들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와 굶주림을 접하면서 왜, 자본주의의 남아도는 잉여물이 그들을 구하지 못하는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너는 아느냐> 이 질문을 시인에게 도로 가져가야겠다.

불과 몇 달 전, 겨우 세 살인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의 주검(데미르 사진)을 두고 유럽의 난민 수용 정책에 변화가 오는가 했더니, 프랑스에서 발발한 IS의 폭탄 테러로 다시 얼어붙는 분위기다. 테러에 대한 분노와 미움이 오죽할까마는 <황금 물고기>로 난민촌 출신 소녀 이야기를 다룬 바 있는 르 클레지오는 그래도 포용을 말한다. “타인에게 문을 열지 않는 문화는 죽은 문화다. 인종에 편견을 둔 폐쇄적인 문화는 평화와 번영에 가장 큰 위협이 된다”(11.25일 이화여대 강연 기사 인용)는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시인은 “관념에 사로잡힌 지식과 지식인은 위험하다”고 거듭 말한다. 문제는, 그게 밖에서는 비교적 명확하게 보여도 정작 본인은 알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더구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잘못된 관념과 신념으로 열심히 일한다면 참 아찔한 노릇이다. 관념은 스스로 깨야 한다. “어린 친구의 질책”이라도 “무겁게” 받아들일 줄 아는 열린 마음이 필요해 보인다. 굳이, 확고한 생각을 갖겠다면 가난한 부모 밑에 와서, 아프리카에 태어나서, 피부 색깔이 달라서, 약자라서 차별받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말해 줄 신념이면 좋겠다. (이동훈)

 

* 관련 사진 석 장과 공익 광고 하나를 같이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