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빙벽 / 박영근

톰소여와허크 2016. 1. 3. 11:06

 

세잔, 큰 소나무와 생트 빅투아르 산(1885-1887)

 

氷壁 / 박영근

 

겨울山은 나뭇잎 하나 붙잡을 것이 없다

침묵의 저 가파로운 칼등

 

바람에 끌려다니던 눈송이들이

일제히 머리를 풀고

바위 절벽에 얼어붙는다

 

어떤 생애의 화살이 날아와 깨뜨릴 수 있을까

흉터와 외침 위에

얼음 저며드는 壁畵여

 

바람도

눈송이도

스스로 부딪쳐 불타올라

온몸으로 절벽이 된다

 

오오 고통만으로

저를 지키고 있는

저 겨울산

 

-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창작과 비평사, 1997.

 

 

*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이육사, 〈절정〉에서)는 시를 읽으면서 이 시는 이육사 아니면 쓸 수 없겠구나 싶었다. 무수한 변절과 다수의 침묵 속에 끝까지 자신의 양심을 행동으로 밀고 나간 시인이 아니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내용임을 느껴서다.

<빙벽>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 노동 현장을 떠나지 않고 자본 독재로부터 노동의 소외를 알리고자 했던 그의 전기에서 연유한 느낌일 수도 있겠지만 위 시의 “겨울산”과 “빙벽”의 서슬 또한 남이 쉽게 차용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다.

“고통만으로/ 저를 지키고 있는” 겨울산과 빙벽이 되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얼마나 가혹했을까. “나뭇잎 하나 붙잡을” 수 없는 외로움과 고립을 견뎌야 했을 것이고, 바람이나 눈송이마저 절벽으로 서게 한 것처럼 자신에게 오는 소식이나 유혹을 다 얼어붙게 해야 했을 것이다.

시인은 끝내 세상과 불화하는 자세를 풀지 못하고 한세상을 건넜다. 자본이 노동의 손을 잡고, 노동이 자본을 나누어 평등해지는 세상이 오기는 하는 걸까. “어떤 생애의 화살”이 시위를 당기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겨울산이 더운 기운을 어찌하지 못하고 얼음을 탁 깨는 날을 생각하며, 그 날을 기다리는 마음만큼은 시위에 같이 걸어두고 싶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