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누님의 가을 / 신동호

톰소여와허크 2016. 2. 20. 00:15


누님의 가을 / 신동호


별러오던 지붕을 손질하던 날

가을볕 아껴 받으며 흙장난하던 오후

누님, 마지막 살을 찌우는 벼이삭을 닮은 누님이

문득 왔다 마을의 개들은 짖지 않고

또 비가 오면 어쩌나 누님의 표정이 어둡다

해질 무렵 벼를 세우던 사람들이

개울물에 하나둘 발을 씻을 때 여전히

사립문 밖에 조카녀석 손 잡고 선 누님

아버지의 싸한 등, 어머니의 한숨만 듣고 있고

괜히 담벼락 밑에서 꼼지락대는 내게

눈길을 준다 막둥아 잘 있었니

고 따스한 눈동자 와락 안겨보고 싶지만

자꾸 내게 오려는 조카녀석

어린것 어쩌냐고 어머니 손을 먼저 이끈다

추석 지나 데리러 올 거예요 죄송해요

김서방 건강해요 걱정 마세요

요놈의 개들 싸우는 소리 들리고 꿈쩍 않던 아버지

돌아앉는다 달이 가려 보이지 않는다

내 빨갱이 사위 둔 일 없다

썩 가그라 동네 소문 쫘 하니 어찌 살꼬

누님의 눈에서 먼저 비 내린다 또 비 오면

추수할 때도 다 됐는데 벼이삭이 썩어버리면

추석은 언제 지나려나

조카녀석의 손을 잡고

누님의 늦은 걸음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가

어머니 작은 보퉁이 내민다

잘 가그라 애 걱정 말고 쌀이랑 꼬추 빻아 보내주마

이거 네 애비가 애써 빚낸 돈으로 읍내서 솜 사다 기운 거다

김서방 갖다 주그레

멀리 밤구름 사이로 달이 얼굴을 내밀고

요란하게 버스가 다가오고 있다.


- 『겨울 경춘선』, 푸른숲, 1991.

   * 이 시집이 출간된 1991년이면, 전전해 출간된 소설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대한 검찰의 이적성 언급이 있었으며, 이후 일부 단체의 고발로 십여 년 재판 끝에 무혐의 판정을 받았다. 해방 전후의 극렬한 좌우 대립과 전쟁, 분단으로 이어지는 갈등이 두어 세대가 흘러간 지금도 현재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념의 경직성이 불가피한 면이 있는 것이지 그 자체를 옳다고 말하긴 어렵다. 북보다 나은 형편임은 분명하겠지만, 남한에서도 이념과 관련해서 다른 목소리를 내었다가는 상당한 고초를 감수해야 했다. 필화사건도 그런 것일 테다. 1970년 <오적>으로 필화사건을 겪으며 '타는 목마름으로' 불쏘시개를 마다하지 않던 시인 김지하가 강경대의 죽음 이후 이를 뒤따르는 학생들을 비판해서 운동권으로부터 외면당했던 시기도 1991년이다.

   빨치산이 원래부터 나쁜 사람이 아니라, 공산 게릴라 활동을 하게 된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그것도 소설의 형식을 빌려 말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은 그 사람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 분위기가 건강하지 않다는 반증일 테다. 오적을 비판하듯이 학생 운동을 비판할 자유도 있어야 하고, 그 비판에 대해서 긍정하거나 부정하면서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는 게 또한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1991년으로부터 또 한 세대가 바뀌어 가고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자유가 오히려 위축된 면이 있어 보인다. 자유롭지 않은 사회에서 희생을 감수해가면서 어떤 주장을 하거나, 이념의 반대편에서 기존의 이념을 성찰할 기회를 주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위 시에서 아버지가 싫어하는 "빨갱이 사위" 곧, "김서방"이 그런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생각해 보면, 누님 눈에 눈물 나게 하는 건 "김서방"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닐 수 있다. 최서해가 일찍 쳐부수어야 한다고 했던 "험악한 이 공기의 원류"(『탈출기』에서)에 막연한 의심이 있다. 공기가 하루아침에 바뀌진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궂은비에 똘똘한 벼이삭을 얻으려면 김서방도, 이서방도 부지런히 벼를 세워야 한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