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길을 위한 변명 / 박현수
블루길을 위한 변명 / 박현수
낚시하던 아이가 물고기를 패대기친다
또, 블루길이야,
조그만 꿈틀거림을 발로 짓누른다
외래종이라 나쁜 물고기란다
제 국토를 지키는 용사처럼 의기양양하다
칭찬을 기다리는 눈빛이다
순간, 유색인종에게 테러를 가하는
백색 젊은이들의 풍경이 겹친다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외래종이 되러 떠나는 이웃들이 떠오른다
나는 우물쭈물 시선을 피해 버린다
꼬마야, 함부로 외래종이라 말하지 말아라
한때는 우리도 모두 외래종이었다
아이에게 차마 해주지 못한 말이었다
사람과 물고기를 구분 못하는
나 따위가 해줄 수는 없는 말이었다
- 『겨울 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 울력, 2015.
감상: 우리 몸에는 우리 것이 좋다고 이야기하지만, 애초부터 우리 것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기 쉽지 않다. “한때는 우리도 모두 외래종이었다”는 말이 더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비록 물 건너왔다고 하더라도 한자리에 오래 있거나 흔하게 되면 외래종이란 말도 슬며시 사라지곤 한다. 산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개망초를 남의 나라 꽃이라고 인식하는 게 쉽지 않듯이, 강물과 호수에 다수종이 된 블루길도 그러할 텐데, 어쩌다가 생태계를 교란한다는 딱지가 붙어 그 혐의를 벗는 일이 난망해 보일 정도다.
시인은 두렵다. 일부 백인이 “유색인종”을 나쁜 인종으로 취급해서 차별을 당연시했듯이, 블루길은 “나쁜 물고기”고 나쁜 물고기는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인식도 그와 같지 않은가 하는 의심이 있어서다. 블루길이 종의 다양성을 해치는, 명백한 걱정거리(이것도 하나의 설득력 있는 주장일 뿐이지만)가 있다 하더라도, 시인은 그런 상식을 불편해 한다.
이런 불편한 감정이야말로 주류가 행하는 상식적인 폭력(?)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블루길이나 이주노동자에 대한 시인의 변명에 공감하는 마음이 크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