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산벚나무의 시간 / 김명리

톰소여와허크 2016. 7. 2. 16:27

 

 

 

산벚나무의 시간 / 김명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산벚나무의 꽃잎 중에는

미묘하게 물소리를 내는 꽃잎들이 있다

낙담한 사람의 애간장을 쓸어 담으려고

들릴 듯 말 듯 적요한 물소리로

범피중류의 꽃잔치를 열어주는 산벚나무 꽃잎들

겨우내 해거름 물소리로 빚은 범종을

나뭇잎 사이마다 걸어두었으니

사월 산벚나무 아찔한 높이에

용케도 녹지 않은 마른 눈발들이 있다

짓무르고 움푹 팬 상처들도

눈발 인 나뭇결 속으로 고요히 잠겨가는 걸까

산그늘 오부 능선에선 부르르 떨며

꽃이 꽃그림자의 봉합선 속으로 들어가는 소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슬픔에도

저마다의 생로병사가 있다는 듯

물소리 붐비는 저녁의 문간엔

제 꽃잎 지우고서도 잎 틔우는 산벚나무

어디로 갈 거냐고 묻지는 않으면서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흘러오는 생의 기척들

 

- 『제비꽃 꽃잎 속』, 서정시학, 2016.

 


 

* 시인의 귀는 산벚나무 꽃잎 한 장의 물소리를 듣는다. 겨우내 최소한의 에너지로 버텼을 산벚나무가 봄기운 타고 물켜는 펌프질 소리를 들었을까. 아니면 산들바람이 꽃을 건드리고 잎과 줄기를 빠져나가며 만들어낸 소리를 들었을까. 그도 아니면,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산사 종소리를 꽃잎에 담았다가 도로 내놓는 반향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시인은 그 미세한 소리를 분별하여, 범피중류(심청가 한 대목) 배 나가듯 생의 곡절을 읽어준다.

낙담한 사람의 애간장을 쓸어 담으려는 소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슬픔을 알아주고 쓸어주는 소리의 주인은 일단, 꽃잎으로 보이지만, 그 꽃잎은 벚나무의 것이기도 하다. 열매에게 잎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그늘로 사라지는 꽃잎의 일, 꽃잎의 소리를 들으며 산벚나무도 새로 주름을 늘일 테다. 나무의 자랑이며 상처인 꽃잎이 스스로 울며 피고 지는 사이, 나무 아래 온 사람도 그만한 고민으로 와서 더러 앓다가 더러 위로받고 돌아나갈 것이다.

짓무르고 움푹 팬 상처를 가진 벚나무일수록 더 많은 꽃을 달아 더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는 이치를 생각하게 되기도 하지만, 산벚나무 아래 생의 기척들을 직접 듣기 전까지는 말을 아끼는 게 현명한 일일 것이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