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팥국수 / 김미선

톰소여와허크 2016. 7. 6. 13:33

 

 

팥국수 / 김미선

 

아버지 먼 동지나해 조업 가신 날

태풍이

바닷속을 뒤집어엎고 있었다

라디오에 귀 붙인 채 식구들

무릎 모으고 조마조마 날밤 지새웠다

 

섬을 쓸어내리려는 듯

양철 풍채* 뒤집으며 세게 내리쳤다

언니는 국수를 밀고

나는 아궁이 불 지피지만

기어 나오는 불길

생솔가지로 틀어막으며 팥을 삶았다

 

무쇠솥이 소용돌이치며 끓었다

붉은 팥물이

하얀 반죽 덩어리 밀어 끓는 동안

가슴 벽 쿵쿵 고둥치고 있었다

 

*풍채 - 햇빛을 가리고 바람을 막는 차양(경상도 사투리)

 

- 김미선, 『닻을 내린 그 후』, 학이사, 2016.

 

 

  *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동지에 팥죽 먹는 풍속이 오래되었다. 팥죽을 대문 앞이나 사방 벽에 솔가지나 숟갈로 뿌리기도 하는데, 팥의 붉은 기운이 액을 막아주고 잡귀를 쫓는다고 믿어서다. 이사 간 집 모서리마다 팥알을 두거나 이웃에 팥시루떡을 돌리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팥에 새알심을 넣는 게 보통이지만 지역에 따라 국수 면발을 넣기도 하고 통영, 남해 지역에서는 팥칼국수를 지칭하는 밀장국이 꽤 알려져 있기도 하다. 꼭, 동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팥국수는 비 오는 날 온가족이 한데 있다든지 특별한 손님을 맞이한다든지 할 때 내놓기 딱 좋다. 팥을 불리고 삶고 으깨는 정성이 배인 만큼 김치를 곁들이면 제법 기분까지 내며 먹었을 음식이다.

  통영 섬마을이 고향인 시인은 언니와 함께 팥국수를 끓이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날은 “바닷속을 뒤집어엎고”, “섬을 쓸어내리려는” 기세로 태풍이 지나던 날이고, 하필이면 그때 아버지가 배 타고 먼 데까지 “조업 가신 날”이기도 하다. 가족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조마조마 날밤 지새웠”다가 팥국수 끓이는 순간에도 “가슴 벽 쿵 쿵”거리는 불안이 가시지 않는다. 가까이 지내며 뜻을 같이하는 경우에 ‘한솥밥 먹는 사이’란 말을 쓰는데 실제, 한솥밥 먹는 피붙이의 정이 이처럼 싸하다. 틀림없이 붉은 팥국수 한 그릇은 아버지의 무사귀환을 비는 마음으로 부뚜막 위나 시렁 위에 정성스레 놓아두었을 것이다. 

  사족이지만, 한솥밥 먹은 사람이 한울음 운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한솥밥 먹고 송사한다는 속담도 있다. 팥알 하나라도 나누려는 마음이 있거나 없거나의 차이일 것이다. 길지 않은 장마지만 몸의 습기도 없앨 겸 설설 끓는 팥국수로 속을 데우고 싶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