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에게 몸살을 옮다 / 박승민
고라니에게 몸살을 옮다 / 박승민
메밀밭이 있던 눈밭에서 고라니가 운다.
희미한 비음이 눈보라에 밤새도록 쓸려온다.
나는 자는 척 베개에 목을 괴고 누웠지만
다시 몸을 뒤척여 민물새우처럼 등을 구부려 돌아누워 보지만
눈바람에 실려오는 울음소리가 달팽이관을 자꾸 건드린다.
바람소리와 울음소리가 비벼진 두 소리를 떼어내 보느라 눈알을 말똥거린다.
눈밭에 묻힌 발이 내게 건너오는지 흘러내리는 찬 콧물이 옮겨오는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코가 맹맹하고 팔다리가 자꾸 쑤신다.
어떤 생각만으로도 몸살은 오는지
몸살은 몸속의 한기를 내보내서 몸을 살리라는 뜻인데
나도 모르는 어떤 응달이 아직 살고 있는지 귀를 쫑긋한다.
아내에게는 고라니에게 몸살을 옮았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혼자 약 지으러간다.
- 『슬픔을 말리다』, 실천문학사, 2016.
* 고라니는 왜, 인가 가까운 밭에 와서 우나. 짝을 잃고 혼자 된 고라니인가. 새끼를 잃은 어미 고라니인가. 아기 원숭이를 잃고 백 리 길을 쫓아와 쓰러진 어미 원숭이의 속이 도막도막 끊어져 있더라는 단장(斷腸) 고사(출전, <세설신어>)에도 생각이 미친다.
시인은 고라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눈밭에 묻힌 발이 내게 건너오는” 시린 느낌을 받는다. 급기야 몸의 한기를 느끼더니 고라니의 몸살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앓고 만다. 고라니에 대한 시인의 반응은 단순히 가엽다는 정도가 아니라 깊은 연민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깊은 연민은 차마 남의 일 같지 않을 때 온다. 남의 일 같지 않을 때라야 진정성이 생긴다. 진정성이 있어야 통할 수 있고, 마음으로 연대할 수도 있다.
자기 안에 살고 있는 “응달”이 스스로 달가울 리 없지만 그 응달이 나 아닌 뭇 생명의 그늘과 아픔을 헤아리는 마음결이 되는 것도 생의 역설이라면 역설이다. 시인은 응달에 햇살을 당겨보듯이 약을 처방하러 나선다. 자신의 슬픔이 고라니의 울음소리와 다르지 않고, 또 다른 이웃의 아픈 사정도 그러할 것이라는 인식도 소중하지만 스스로 또 함께 슬픔을 말리려는 태도도 썩 요긴한 일일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