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라면 혹은 냄비에 대한 추억 셋

톰소여와허크 2016. 12. 4. 09:11

 

 

 

 

 

라면 혹은 냄비에 대한 추억 셋 / 이동훈

 

 

오원 십원 하던 만화에 푹 빠진 동무는 제 점방을 털었어.

냄비에 든 동전 몇 닢 그러쥐고 시장 길까지 줄달음질쳤으니

그런 풍경도 꽤나 만화적이었을 거야.

점방 아주머니 병나고

점방 아들 철나면서 만화의 세계를 일찍 졸업한 건

꼽사리 끼던 내겐 몹시 불운한 일이었어.

냄비의 축난 돈을 아는지 모르는지

셈도 없이 라면 끓여주고 아들 대하듯 머리 쓸어주던 아주머닌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고

점방 문이 닫히고, 점방 아들은 점점 먼 데서 편지를 부쳐왔지.

 

지방 대학 시절, 계단 밑 지하 창고를 자취방으로 썼어.

안 그래도 곤로의 석유 냄새로 지끈거렸을 머리인데

낮은 천장을 깜빡한 대가로

콘크리트와 그 세기를 겨루었으니

한 발 늦은 후회와 자책으로 머리통을 꾹꾹 눌러대어야 했어.

라면 봉지와 계란 몇 개 들고 방문했던 벗들도

좁은 문으로 엉거주춤 들어와서는

나갈 땐 무심코 일어나서 그예 번갯불을 냈지.

그때부터 머리 감싸는 게 생활이 된 벗은

냄비의 라면 맛만큼은 기절할 정도라며 지금도 엄지를 세우지.

 

누군 라면 몇 박스 없애고

낮잠으로 국방부 시계를 다 돌렸다는데

삽자루 몇 개 부러뜨려도 막막하던 초병 시절

고향 안부를 묻던 선임이 느닷없이 암호를 대라고 했지.

손목에 적어둔 글자도 못 보고 바짝 얼어 있으니

헬멧을 개머리판으로 찍지 않겠어, 젠장!

그나마 바로 졸도한 게 재수야.

다시 지워지지 않을 암호는‘종로’ 그리고 ‘냄비’였으니

그날 이후 구세군 냄비만 봐도 절레절레하지.

 

졸고 졸아서 바닥이 헌 양은 냄비.

신발장 위에 놓인 냄비에 동전 몇 닢 쨍그랑하니

호기심 어린, 점방 아들 같은 눈이 따라오지 뭐야.

그래, 지금

라면 익는 냄새로 흠흠거리는 저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