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 장영길
아버지와 아들 / 장영길
서류 가방 하나씩 나눠 쥐고 아버지와 아들이
동대구역을 간다
꼿꼿한 뼈와 핏줄을 댓줄기처럼 고추 세우고
아버지와 아들은 몇 걸음 떨어져서 걸어간다
같은 빛깔의 뼈와 핏줄 사이로
해맑은 열 나흗날 달빛이 속살까지 스며들고
밝음과 시새움이 어둔 구름 속으로 접어들면
달무리 지우려다 멀리 기적 소리를 듣는다
아버지와 아들이 성큼성큼 동대구역을 간다
앙상한 세월들이 널부러져 있는 출구에서
발길은 앞으로 향하지만 몸은 뒤로 머뭇거림은
깊은 상처의 바람이 끝자락을 끌기 때문이다
남은 날이 더 많은 기름진 얼굴의 아들과
노을 진 강물에 몸 적셔 가슴 쓰린 아버지
달빛 아래 명아주 풀잎 같은 희망을 끌고
항아(姮娥)의 발길이 구름에 묻혀갈수록
가방에는 한 줌의 허상의 물결이 갸웃댄다
흐늘거리는 분수의 무지개를 가슴에 넣고
걸어가는 부자의 허리춤에 가을 풀벌레 소리가
촘촘히 매달려 길의 무한대를 알려주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무엇을 찾아 어디로 가는가
깃발은 사방에서 서로의 날개를 펄렁이는데
핏빛 동백꽃도 피우지 못한 아들을 데리고
모래밭에 젊고 서러운 기억을 묻어 놓은 채
사랑이 머문 열차를 향해 개찰구로 들어간다.
- 『사랑조』, 엠아이지, 2006.
* 아이는 누군가의 아들이면서 미래의 아버지였다가 현재의 아버지가 된다. 아이 안에는 이미 자신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삶이 유전되고 있다. 이상(李箱)은 ‘시 제2호’에서 너무 많은 아버지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 되냐고 자조한 바 있지만 단 한번의 아버지 노릇도 쉬운 것 같지는 않다.
“꼿꼿한 뼈와 핏줄”은 아버지와 아들을 잇는 혈연의 정이자 연대감의 표현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험한 세상에 주눅 들지 말고 “댓줄기처럼 고추 세우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을 텐데, ‘고추’란 말이 유난히 환하다. ‘곧추’의 오기일 텐데 국어 선생이기도 했던 시인이 부자간의 이야기인 만큼 일부러 받침 ㄷ을 날리지 않았을까 싶은 거다. 꼿꼿한 뼈는 “명아주 풀잎 같은 희망”을 말하는 부분에도 슬쩍 나타난다. 명아주는 풀이면서도 줄기를 꼿꼿하게 세워 지팡이 재료가 되기도 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세상살이는 제 줏대로 딴딴하게 사는 것을 엔간히도 흔드는 일이기도 하다. 바람으로 사뭇 흔들고, 더 센 물결로 얼을 빼기도 한다. 서류 가방에 든 “허상의 물결”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생계와 욕망, 도전과 좌절이 한데 어울려 묵직하지 않았을까. “젊고 서러운 기억”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겠으나 분명한 것은 깃발이 각자 펄렁이는 이치대로 자신의 몫은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가방을 남의 가방으로 바꾸어 갈 수는 없는 거다.
이 시는 상처를 말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의 가방을 안쓰럽게 바라볼 때쯤 가을 풀벌레 소리가 “길의 무한대”까지 열어 가는 명랑한 느낌도 없지 않다. 짊어진 가방의 무게는, 사는 동안 빠지기고 하고 더하기도 하겠지만 부자에게 그날의 기억은 풀벌레 소리로, 기차 소리로, 그리움으로 오래 남아있을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