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대국 / 임보

톰소여와허크 2017. 1. 10. 00:04




대국對局 / 임보



오동나무 그늘 밑에서

두 노인이 바둑을 놓고 있다

가만히 들여다봤더니

두 분의 기력이 八, 九급쯤?

二급인 내가 보기엔

참 답답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지켜보고 있던 내가 참다 못해

“끊어서 잡으십시오”

하고 흑黑의 노인에게 훈수를 했더니

“아직 빈 땅이 많은데 왜 싸움을 거나?”

하고 듣지 않는다.

“치중置中하여 파호破戶를 하면 잡을 수 있습니다”

하고 이젠 백白의 노인을 거들었더니

“살려 주고도 이기면 그게 더 낫지 않겠나”

하고 웃는다

도대체 이 벽창호 노인들

내 훈수엔 아랑곳하지 않는다.

싱거운 바둑은 해가 기우는 줄도 모르고 계속되었는데

백팔십여 수쯤에 이르러서

갑자기 흑黑이 돌을 던지고 말았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내 보기엔 분명 흑이 열댓 집 앞서고 있는데

돌을 던지다니

알고 보았더니

그들이 상上으로 치는 선승善勝은 일호승一戶勝

오호五戶 이상의 승勝은 패敗보다 낮은 것으로 치는데

부득이 그 욕심을 줄이지 못할 때에는

차라리 돌을 던져

상대에게 예의를 갖추는 모양이다.

그러니 그들의 바둑 급수를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얼굴이 붉어져 얼른 자리를 뜨고 말았다.


- 『구름 위의 다락마을』, 우이동사람들, 1998.


* 선시仙詩로 이름한 데서 보듯이 이 시집은 신선 세계의 기이한 경험담이 많다. 비현실적이고 꿈같은 이야기의 이면에는 물질주의가 가속화되는 현실에 대한 비판도 있어 보인다. 출세의 유혹으로 부정을 일삼거나 부정을 눈감아 주는 부류가 있고 그런 치들일수록 잘나가는 세상이 예나 지금이나 엄연히 있다. 개인으로 복장 터지게 불만이 있다 하더라도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를 찾지 못할 때, 한 발짝 발을 떼면서 지금과 다른 세상을 꿈꾸는 방법이 있으니 이 역시 물신에 젖은 현실 체제와 사유 구조를 비판하는 저항적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시에서 보듯 두 명의 노인이 바둑 두는 풍경은 꽤나 흔한 것이긴 하지만 그들이 남긴 기보는 예사롭지 않다. 二급 이상의 고수면서 관전자이기도 한 화자는 끊어서 잡기, 치중과 파호를 훈수한다. 적의 급소로 돌을 보내는 것이 치중이요, 그렇게 해서 상대방의 집을 깨는 것이 파호니 공격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전략이라 하겠다. 훈수에 응하지 않은 두 노인이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방법을 선호하는 것은 그들의 스타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돌연 이기고 있는 자가 돌을 던지는 데서 상식은 깨지고 기이가 개입한다.

한 집이나 한 집 반을 이기는 것이 선이요, 다섯 집 반을 이기는 것은 진 것보다 못하다는 논리는 억지에 가깝긴 하지만 아하! 무릎을 치게 되는 순간, 새로운 경지를 엿보는 즐거움이 생긴다. 더불어 산다고 얘기하면서 한 집도 아니고 다섯 집 이상이나 더 가지는 건,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는 거다. 승리의 대가로 미안하지 않을 만큼 아주 조금만 더 갖겠다는 거다. 1 대 99니, 20 대 80 사회니 하는 불평등 구조를 일시에 허무는 절묘한 한 수가 아닐 수 없다.

시인이 아래로 보았던 노인이 급수는 한 집 반이나 반집을 많이 남겼던 이창호 그 이상이니 이 세상 급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한 수 제대로 배웠다는 시인에게 나 또한 배움이 적지 않다. 혼자 집 짓고 혼자 잘 살면 뭐하나. 이름다운 대국을 위해서 바둑돌 던지는 법부터 새로 배워야 마땅한 줄 안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