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뿔 / 권석창
쥐뿔 / 권석창
여자와 나는 카페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나는 말끝마다, 쥐뿔도 모르면서
쥐뿔도 아닌 게, 좋긴 뭐
쥐뿔이 좋아, 이랬다.
쥐뿔이 뭐예요?
우리가 쥐를 잡아서 머리를 만져봐도
쥐뿔은 없어.
쥐뿔은 말만 있고 실체는 없어.
쥐뿔은 투명해.
쥐뿔은 빈집이야.
쥐뿔은 아름다워.
나는 쥐뿔을 사랑해.
여자가 말했다 그렇담
나도 쥐뿔이 될래요.
흑인 올훼의 주제 음악이
우리의 이야기 사이로 지난다.
순간 여자의 표정이
쥐뿔 같다는 느낌이다.
우리들의 쥐뿔론은 깊어 가는데
어디선가 티브이 상자 속에서는
쥐뿔도 아닌 것들이
톡톡 튀어나온다.
- 『쥐뿔의 노래』, 모아드림, 2005.
* 아무것도 아닌 것이 같잖게 굴 때 “쥐뿔도 모르면서”, “쥐뿔도 아닌 게” 나댄다고 말들 하지만 왜 하필 있지도 않은 ‘쥐뿔’이지 물으면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다. 이 시는 여자의 이런 물음에 대한 시인의 즉흥적인 대답을 가다듬은 것이다.
실제 쥐뿔은 쥐불 그러니 쥐의 불알에서 단어 의미가 파생되어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쥐가 남편으로 변장하여 아내와 같이 살다가 고양이를 들고 온 진짜 남편에 의해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는 민담도 꽤나 익숙하다. 남편 입장에서는 사람 불알과 쥐 불알을 구별 못하는 아내가 섭섭하긴 했을 것이다. 그러니 쥐뿔도 모른다는 말은, 알 만한 사람이 아는 눈치를 전혀 보이지 않거나 모르쇠로 일관할 때 불평조로 내는 말이기도다.
그렇지만 이런 어원에만 집착하는 일이야말로 진짜 쥐뿔로 모르는 게 된다. 시인은 쥐뿔은 없다에 주목한다. “말만 있고 실체는 없어” 그래서 “투명해”, “빈집이야”로 자신의 쥐뿔론을 펴면서 투명하고 가난한 삶에 대한 자존심 같은 것도 슬쩍 내비친다. 어쨌든 시인은 없는 것을 말하고 없는 것을 사랑한다고 떠든 셈인데 지금 없는 것이야말로 진짜 자신이 있기를 바라는 무엇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꺼이 쥐뿔이 되겠다는 여자의 말에 사기가 올랐는지, 아니면 시인 스스로 쥐뿔이 되고 싶었는지, 이후 시인은 필명으로 서각(鼠角)을 애용하고 있다. 시인의 말처럼 “쥐뿔도 아닌 것들이” 주인 행세하며 욕심을 채우는 일을 연일 목격하고 있다. 쥐뿔이, 없는 것을 사랑하다가 어쩌다 뿔내기도 하는 성정이라고 할 것 같으면, 쥐뿔! 몇 번 불러도 좋지 않은가.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