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적 / 김용범
원적(原籍) / 김용범
가끔씩
원적을 적을 때마다
미지의 토양에서 배어 나오는
흙의 냄새를 확인한다.
‘평안남도 평양시 신양리 184번지’
원적을 적을 때마다
작은아버지가 들려주시던 그곳의
지형과 몇 그루의 추리나무와
보통강의 시퍼런 물결과
코끝이 아리던 겨울 혹한의
추체험의 기억들을 되살린다.
내가 살아 보지 못하였던 그곳의 겨울
내가 느껴 보지 못하였던 그곳의 여름
내가 확인할 수 없었던 그곳의 봄과 가을.
원적을 적을 때마다
그곳으로 이미 떠나가 계신 아버님을 생각한다.
그런 아득한 그리움.
그런 친근함.
오늘 낮달이 혼자 빈 하늘에 걸려 있듯
내겐 낮달과 같은 동네
추리나무 몇 그루에 부는 바람.
- 『고구려 시편』, 문학아카데미, 1998.
* 이조년의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에서 이화(梨花)는 배나무 꽃이다. 만약, 이화(李花)로 표기하면 오얏나무 꽃이 된다. 시인의 고향이기도 한 평안도 지방에서는 오얏나무 대신에 추리나무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다. 현재 표준국어대사전엔 오얏을 자두의 옛말로, 추리를 자두의 방언으로 적고 있다. 시인이 원적을 이야기하는 마당에 추리나무란 말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정이 읽힌다.
원적은 원래의 본적이 있던 곳이니 대개 부친의 호적을 그대로 따른다. 시인이 출가해서 세대를 구성한 곳으로 본적을 옮길 수는 있으나 원적을 쉽게 바꿀 순 없다. 시인의 원적은 북한이다. 한번도 “살아 보지 못하였던” 곳이고 반공 이념이 유난했던 시절을 지나온 만큼 원적을 내세우는 마음이 살뜰하게 느껴진다. “신양리 184번지”는 시인의 아버지가 있었던 곳이다. 아버지가 밟고 다니던 땅, 아버지가 본 하늘과 들, 그곳 사람들의 풍속과 인심이 아버지의 핏속에 있다가 시인에게 유전되었음을 시인은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아득한 그리움”으로, “친근함”으로 애써 원적을 기록해두려고 한다.
하지만 시인은 원적을 가까이 두고, 평생 갈 수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 원적은 “낮달”과 같아서 낮에 잠깐 나왔다가 금세 사라지지만 또한 추리나무를 지나는 “바람”과 같아서 때가 되면 가슴으로 불어오는 곳이다. 고향 흙과 추리 향과 맛이 추체험이 아니라 오감으로 체험하는 그날은 정말 바람에 그치고 말건지 봄날 자두에게나 물어봐야하는 씁쓸한 날들이 가고 있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