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알밤 깎기 / 박숙경

톰소여와허크 2017. 2. 22. 23:11




알밤 깎기 / 박숙경



깎던 알밤을 밀쳐두고

엎드립니다

詩 앞에 엎드렸다고 전투적이 아니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럴 때쯤이면 밴드닥터와 후시딘이 필요하리란 걸 예감하지요

예감했다는 건

예리한 칼날에 엄지손가락이 베일 거라는 걸 예측했다는 말

이미 알고 있었거나

알고 있지 못했거나는 상관없는 일

그저 잠시 날카로웠고

그저 약간의 핏방울이 보였다는 거

며칠 지나고 나면 말짱해질 걸 알기에

잠시의 날카로움 따윈 묻어두기로 해요


알밤을 깎는 일에 몇 방울의 피는 대수도 아니라고 당신이 던진 삐딱한 그 말이 심장을 긋고 지나갔지만 그조차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내가 어쩌면 더 전투적일 수도 있네요 전투적인 질문에 전투적인 답을 생각했으므로 나는 그냥 괜찮기로 마음먹고 그 전투적임을 잊어버리네요


알밤을 깎는 일은

그런 거예요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에요


쓸쓸해서 가을인 거에 비하면요


- 『날아라 캥거루』, 문학의전당, 2016.


   * 아픈 데 남이 알아주지 않을 때 서럽다고들 한다. 이때 남은 아주 모르는 남이 아니라, 내가 알 만한 남이고 나를 알 만한 남이겠다. 남이 내 맘 같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알 만한 사람이 알은척해주지 않으니 부아가 날 만도 하다.

   세상일이 그렇다. 내가 큰일 난 것처럼 굴어도 상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더러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전의 상황 같으면 날카로운 말들이 오갔을 수도 있겠으나, 시인은 날카로움을 날카로움으로 되돌려주지 않기로 한다. 서로 무뎌지면서 이해의 폭을 넓힌 면도 있겠으나, 전투적인 것을 전투적으로, “대수도 아니라고 당신이 던진 삐딱한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식이었음을 고백하고 또 이를 잊기로 했다며 다소 복잡한 심경을 비친다. 화해의 제스처는 취하되 자신의 것을 놓고 무작정 묻어가지는 않겠다는 태도로 보인다.

   특히, 시 앞에서 더 그렇다. 남이 대수롭게 않게 보더라도 시인에게 이만한 대수가 없다. 알밤 깎기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 말고도, “약간의 핏방울”에도 놀라워하며 상처에 댈 “밴드닥터와 후시딘”를 생각하는 마음이 시를 쓰는 진짜 무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동훈)